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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의 정체  
       
작성일 2019-01-20 (일) 17:18
   
“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장훈태 교수> ”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장훈태 교수>
 


 한국 기독교는 타종교의 정착, 이주자들의 종교 문화, 사회적 규범의 전이 등의 변화로 인해 서서히 갈등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각 도시마다 사원을 건립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공동체 모임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이제 한국 내의 본질적인 화제가 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대 종교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일신 종교, 책의 종교라는 점이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으로 유일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경전, 교리, 예배 의식, 신학적 차이 등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또 다른 개별적인 특징이 있는 종교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두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여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접근 방법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는 아브라함의 종교, 유일신론, 책의 종교라는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갈등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현상학적 연구는 두 종교 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근원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기독교와 이슬람 갈등의 신학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양 종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논제이고, 양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급선무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땅 위에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피는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예수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증오의 담을 헐어 버리셨고 증오를 증식시키셨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양 종교가 각기 갖고 있는 경전, 신학, 예의, 의식, 모든 일에 충실하면 된다. 각 종교 본연의 일을 하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양 종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정면 대결을 통한 해결을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 양 종교가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본연의 신앙생활에 충실할 때 갈등이 없는 지구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Ⅰ. 들어가기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한국정착과 이슬람 금융, 무슬림들의 한국 사회 정착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와 기업에 공헌하면서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고 있다. 선교 125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독교는 타종교의 정착, 이주자들의 종교 문화, 사회적 규범의 전이 등의 변화로 인해 서서히 갈등을 맞이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기독교계의 이슬람 정착에 대한 우려와 염려는 이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각 도시마다 사원 건립을 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공동체 모임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이제 한국 내의 본질적인 화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의 충돌 양상은 세계적 현상으로,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스위스와 프랑스를 비롯한 그 외의 여러 지역에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테러, 폭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 이에 대한 반응은 그리 달갑지 않다. 각 종교마다 갖고 있는 전통과 의식, 교리에서 오는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충돌은 불가피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대 종교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일신 종교, 책의 종교라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두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여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접근 방법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좋은 관계를 형성·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현대 이슬람은 돈에 대한 갈증, 일에 대한 집착, 과도한 기술 문명, 조잡한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입지를 굳혀 가고 있다. 또한 궁극적 절대의 종교, 풍성한 문명, 심오한 인본주의, 영적인 신앙심은 이슬람이 보다 우수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는 아브라함의 종교, 유일신론, 책의 종교라는 원리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갈등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현상학적 연구는 두 종교 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근원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양 종교의 지도자와 신자들이 상호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와 관련하여 양 종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논제는 곧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기독교와 이슬람 갈등의 신학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Ⅱ.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창조, 타락, 구속, 부활, 승천, 재림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교리는 삼위일체론, 성육신, 구속사다.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이라는 기독교의 세 가지 교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새로운 종교가 서기 622년 메디나1)에서 발생했다.2) 특히 이 종교의 경전인 꾸란은 3분의 2가 메디나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란에 나타난 이슬람 교리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육신과 구속의 교리 등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the Trinity)는 터툴리안이 최초로 사용하여 그 교리를 형식화하였지만 그 형식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자가 성부에게 부당하게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리겐은 이 입장에서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는 신격에 있는 이 두 인격의 필수적 신성의 가치를 떨어뜨렸는데, 이는 아리안파(Arians) 형성에 디딤돌을 제공하였다. 아리우스파는 성자가 성부의 최초 피조물(the First creature)이며 성령을 성자의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등하다는 동질성은 하나님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되었으며 신격의 삼위 등급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아리안파는 여전히 신격 안에 있는 삼위 교리의 외형을 존속시켰지만, 이 교리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위하는 또 한편으로 성자의 신성을 보존하는 일위신론(Monarchianism)에 의해 희생되었다. 동력적 일위신론은 예수를 단지 사람에 지나지 않는 자로 성령을 신적 감화로 보았지만, 형태적 일위신론은 성부와 성자, 성령을 단지 신격에 의해 연속적으로 표시된 세 가지 현현의 방식으로 간주하였다. 한편 하나님의 유일성을 간과하고 삼신론을 주장한 자들도 있었다. 일부 후기 일성론자들 즉 존 아스쿠나게스와 존 필로포누스 같은 사람은 이 오류에 빠졌다. 중세기에는 유명론자인 로스셀리누스가 동일한 오류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삼위일체 교리는 4세기에 공식화되기 시작하였다. 니케아 회의는 성자를 성부와 일체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A.D. 325). 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1)는 비록 동일하게 세밀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였다. 삼위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 의해 발생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한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삼위일체 교리는 더 이상 발전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교리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유일성에 비중을 두었으며, 신학적인 논의는 보다 하나님의 인격에 비중을 두었다. 하나님은 계시자이며 계시(성자)이며, 계시하는 것(성령)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구약성경에 폭넓게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복수로 말하고 있는 곳은 창세기 1:26, 11:7이다. 그 외에 창세기 16:7-13, 18:1-21, 19:1-28, 말라기 3:1 등이다. 한 인격으로 언급되는 곳이 시편 33:6, 45:6-7도 있다. 메시야와 성부와 성자를 모두 언급하는 곳으로는 이사야 48:16, 61:1, 63:9-10 등인데, 이는 삼위일체에 관한 보다 완전한 계시를 함의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증거는 종종 여호와 엘로힘 사이의 구별과 함께 복수형인 엘로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언급으로는 성자와 관련한 내용에서 발견된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그의 백성들의 구속자와 구세주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그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주하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한다면, 신약에서 교회에 거주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신약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성부가 성자에게 이야기하시며(막 1:11; 눅 3:22) 성자가 성부와 교제를 가지시며(요 11:41, 2:27) 또한 성령이 믿는 자들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기도(롬 8:26)하심을 믿는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은 신적 실유에서는 구분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본질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실유 또는 구조적 본성에서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의 신적 실유에는 세 인격 또는 개별적 실재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 하나님의 구분되지 않은 온전하신 본질은 세 인격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보다 분명한 성경적 근거에 의하여 믿는다.

 

기독교의 중심 인물은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게서 시작된다. 예수를 보는 상식적 시각은 종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수를 신이라고 인정하기보다는 선지자 혹은 성자로 말하는 종교도 있다. 하지만 예수가 성육신하여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게 전달된 것은 탁월한 가르침과 행동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단순히 한 사람의 교사나 역할 모델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범주를 빌어 예수를 기독교인의 랍비, 현자로 묘사한다면 이것은 예수의 성육신, 인류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다. 예수는 단순히 교사, 역할 모델의 범주에 한정되는 분이 아니다. 예수는 교사이며 역할모델이면서 그 이상을 초월한 분이다.3) 예수의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식(義識)이다. 기독교는 독립적인 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기독교 신학이 사색과 숙고의 과정에서 돌아가야 하는 일련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 역사 종교다.4)

 

그러나 예수의 중요성은 역사적 의미를 초월한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창시자에 불과한 분이 아님을 믿는다. 예수는 하나님을 알리고, 구원,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 준 분이다. 이를 통해 보면 예수는 하나님을 계시한다(골 1:15; 요 14:9).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다. 마틴 루터는 “이슬람에는 꾸란이 있고 유대교에는 토라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알리길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알려 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수는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다.”라고 했다.5)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들어오셨다는 기독교의 특별한 사상”이다. 성육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통하는 창”이라는 기독교의 특별한 믿음의 기초이다.

 

예수는 구원의 기초다(눅 2:11). 그는 백성을 친히 죄에서 구원하였고 그분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행 4:12). 그는 구원의 창시자이다(히 2:10). 따라서 예수는 구속받은 삶의 모델이다(엡 5:1).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 준다. 예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몸으로 보여 주고 계신다.6) 이는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일 4:7-11). 사랑하는 것이 곧 성육신 교리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육신 교리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구속은 매우 의미가 있다. 예수는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신다(마 1:21). 그분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행 4:12). 그분은 구원의 창시자다(히 2:10). 이런 사역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다.7) 기독교의 구속은 죄를 사하는 데서 시작된다.

 



Ⅲ.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

 


A.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의 정착

 

이슬람은 흔히 이슬람교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내세운 일신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이론이다. 이슬람교는 아랍의 메카를 기도의 방향으로 정한 것은 아랍의 전통 위에 확립시켜 세계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와의 결부를 부정한다는 뜻이다.8) 이슬람의 가르침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아랍어로 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슬림 역시 이슬람을 복종하는 자나 이슬람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간주한 유럽 제국, 곧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배 하에 떨어졌던 무슬림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독립을 차지했다.9) 중동 지역과 터키, 이집트에서는 20세기 초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았었지만 기독교 소수 집단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처럼 추방되었다. 가끔 아르메니아인들처럼 학살당하기도 했다. 좀더 강력한 무슬림 소수 집단은 결국 평화롭게 유럽 지역에 정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과 프랑스다. 프랑스는 무슬림 소수 집단이 인구의 10%는 차지할 정도다. 인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20여 년 후에는 20%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독일, 미국에서는 그 숫자가 미미하지만 어쨌든 의미심장하다.10)

 

이들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 사건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문제는 인구 통계학적 방식과 공동체적 방식, 동화의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의 방식으로 제기되지만 보다 깊은 의미로는 종교적 방식으로 제기된다.

 

특히 프랑스가 ‘이슬람 공화국 된다’는 신문 기사는 서유럽 기독교 국가에는 충격이다.11)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꾸란 종교의 정착은 조금씩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 종교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은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39년 안에 프랑스는 ‘이슬람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란드는 15년 안에 인구의 반을 무슬림이 차지하며, 독일은 2050년 무슬림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12)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유럽 연합 내 회원국의 인구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50년이면 EU 내 무슬림의 수가 20%까지 급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08년 유럽 연합 회원국 내 무슬림 인구는 전체의 5%에 불과했다.

 

이미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7개 중에는 모하메드, 아웁(Ayoub), 메흐디(Mehdi), 함자(Hamja) 등 이슬람 이름이 절반을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스페인은 전체 인구에서 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비율이 1998년 3.2%에서 2007년에는 13.4%로 증가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은 전체 인구에서 무슬림이 25%에 달한다. 런던, 파리, 코펜하겐 등의 주요 도시도 10%에 이른다.

 

인구의 90%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오스트리아의 경우, 2050년에는 15세 이하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유럽의 인구학적인 변화는 교육, 주택, 복지, 노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통계는 유투브의 인구 통계 내용이다.13) 이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유럽인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이슬람 공동체의 정착은 출산율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보편적 견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슬람 비중치는 대부분 과장되었음을 말한다. 어느 한편도 정당한 정보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유럽에 이슬람의 정착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인은 자신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와 문명이 발생하는 것, 공립 학교의 차도르 허용이나 혹은 금지에 대해 토론할 때 그들은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다고 핑계를 댄다. 그것은 인종과 관계된 것이 아닌 종교와 관계된 것임에도 종교적 불관용으로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일 경우 이슬람의 가치를 옹호하고 이슬람과 자신들의 종교의 공통점을 집착하는 데 성직자들이 쓴 문헌을 읽었다. 이 책들은 결국 이슬람을 위한 선전으로 읽히게 되었다.14)

 

유럽에서 이슬람의 정착 요인은 이주민과 종교적 연구, 저서의 발표, 무슬림 인구 통계, 출산률 등이다.

 


B.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정착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그 외의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독특하다. 이 지역에 이슬람이 정착한 것은 정복, 중앙 집권화 된 국가의 강제, 외국 무슬림의 집단 이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역을 통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또한 대대적인 사회적 변화와도 무관하다. 이슬람의 동남아시아 정착은 절대적으로 무슬림 상인과 포교사들의 덕분이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소그룹 공동체를 건설하고, 국가의 형성과 교역 또는 정치적 정통성 확보에 관심 있는 현지의 엘리트들을 회유하여 이슬람이 정착하도록 했다.15)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정착한 것은 무슬림 상인들의 접촉과 정치적, 상업적 경쟁의 결과다.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가 정체성의 상징을 점진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인도네시아 이슬람 정착은 13세기경으로 올라간다. 당시 인도와 아라비아,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상인과 수피들이 처음으로 이슬람을 소개했다. 무슬림과의 무역에서 인도네시아 무역상, 중국 무역상과 경쟁을 하면서 해안과 강변의 소규모 공국의 통치자들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중심 교리와 이슬람의 발생 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출발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일신교 가르침이 곧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믿는다. 꾸란 2장 125-140절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 가르침의 근본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족장 시대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카바 신전의 건설자가 아브라함이라고 보고 있다. 이 같은 부분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양 종교의 출발점에 대한 이론적 불일치는 결과적으로 갈등 즉 대화의 부재, 일치할 수 없는 긴 터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Ⅳ.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A. 기독교가 이슬람을 거부하는 견해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는 개인적인 삶과 가치 체계를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기독교의 도덕적 요구가 무슬림에게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듯이 보인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무슬림을 불안하게 한다. 그 교리는 하나님에게 연합체를 부여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시르크16)에 노출된 듯하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종교의 안정성과 견실함에서 자연에 대한 거부이다. 이슬람에서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알라의 계시만 있을 뿐이다. 둘째, 역사에 대한 부정이다. 성경은 역사이다. 계시는 단적으로 이행된다. 하나님은 말과 행위에 의해 역사에 개입하신다. 그러나 꾸란은 창조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해석하는 권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꾸란은 하나님의 역사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여러 역사를 포함한다. 셋째, 종교적 미덕과 관계가 있다. 계시가 된 종교에서처럼 자연 종교에서 발견되는 것이 도덕적인 미덕이다. 그 미덕은 경건함과 기도와 경배와 제사 의식 및 다른 비슷한 행위를 담당한다. 꾸란에서 계시의 진정성이 거부된다면 무슬림 신앙을 종교적 미덕의 특별한 형태에 결부시키지 않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17)

 

자끄 웰륄은 기독교가 이슬람을 거부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말하는 데 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갈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난 아들을 위한 약속과 축복은 있다. 그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안다. 사라는 하갈을 쫓아 내고,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도망가다가 천사에 의해 구출된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은 천사의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수한 후손이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는다. 이러한 점이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부분일 것이다.18) 그러나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강한 주장을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거부의 견해가 된다.

 

다음으로 꾸란은 ‘마지막 계시’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슬람 신학은 인간 역사에서 네 권의 영감된 거룩한 책이 있다고 가르친다. 모세의 토라, 다윗의 시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 그리고 꾸란이다.19) 만약 꾸란과 이전의 계시 내용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 당연히 꾸란을 우선 순위에 둔다. 무슬림들은 꾸란만이 변질되지 않는 상태로 현재까지 보존된 유일한 책이라고 믿는다. 꾸란은 태초부터 하늘에 보관되어 있던 원본과 정확하며 원본과 일치하는 사본이다.20) 이슬람은 그들의 경전인 꾸란이 1400년 동안 단 한 글자도 왜곡되거나 첨가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한 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꾸란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다. 꾸란에 대한 이슬람교의 절대적 신뢰는 기독교와 내면의 갈등 요인이 된다.

 


B.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적 차이로 인한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은 출발부터가 다르다. 기독교는 창세기의 아담으로부터 출발점을 기초로 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족장 시대 인물이며 믿음의 아버지로 보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을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보는 데서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말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믿음의 길을 따라간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계보를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아 출발점에서 다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은 충돌과 갈등의 원인 제공도 되지만 그 점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 66권을 갖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21)이다. 꾸란은 총 114장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언어라고 한다. 꾸란은 이슬람의 교리, 종교 의식, 윤리법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늘날 세계화, 환경, 테러리즘과의 전쟁, 약물 복용, 의료 윤리, 여권 신장, 혼인과 이혼 등을 지원해 주는 내용을 꾸란에서 찾을 수 있다.22) 그러나 성경은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구약 39권 신약 27권이다. 성경은 40여 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한 번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 사후 632년까지 계속해서 저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함마드는 글을 알지 못해 그의 추종자들이 이를 외우고 있다가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얼마 후 책으로 펴내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23) 꾸란은 철저하게 아랍어만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은 히브리어, 헬라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 다른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경전에서 공통점은 모두 신의 계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두 종교의 경전 모두 신의 영감된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이 경전에서 차이는 기독교는 성경을 통하여 창조, 타락, 구속, 부활, 승천, 재림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꾸란은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계시라고 하지만 성경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24) 이희수 교수의 주장대로 성경과 비슷하다면 꾸란은 완전한 경전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싶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그리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속의 드라마를 묘사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에 참여하고 구속에 공헌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창조 기사를 붙들고 있다. 성경의 사건 기록은 이스라엘의 먼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의 언어 형태, 스타일, 비유의 형상, 그리고 개념에 있어서 묘사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반영한다.25) 성경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즉 창조주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증거한다(행 14:15-17; 롬 1:19-20).

 


2. 성경과 꾸란의 차이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의 꾸란은 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과 꾸란은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꾸란과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전혀 다르다. 기독교 신학과 이슬람의 신학도 차이가 있다. 만일 같다면 기독교 신학대학과 이슬람의 샤리아 대학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양 종교의 신론이 다르다. 이슬람에는 성령론과 기독론이 없다. 기독교의 예정론은 이슬람의 숙명론과 다르다. 성경에는 꾸란에 나오는 무함마드가 없다.26) 보다 구체적으로 성경과 꾸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성경에 기록되거나 문서화되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그 문서가 사도들의 것이냐? 그 문서가 신앙에 부합하느냐? 그 문서가 모든 교회에게 인정되는가에 있다. 몇 편의 문서를 놓고 몇 세기 동안 논쟁을 거친 후 정경으로 인정한다. 서방교회(로마 카톨릭)에서는 히브리서의 인정을 놓고 논쟁을 했고, 동방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놓고 논쟁했다.27) 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은 4세기경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을 보면 성경은 교회의 신앙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꾸란의 형성은 성경과 다르다. 꾸란은 전적으로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것이지만 어록이 더 많다. 꾸란 42:7; 20:113; 12:2을 참조하면 “그래서 우리는 네가 그 도시(메카)의 어머니와 그 도시 주변 사람들을 경고하도록 하기 위해 너에게 아랍어로 된 꾸란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그의 말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그 기록은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되었다. 종말론적 경고로부터 신학적 논의를 거쳐 법률 규범과 설교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본문 양식을 포괄하였다.28) 이 때부터 단편적인 문장은 주제별로 묶어 정리하고 그 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정하였고, 무함마드의 죽은 후 꾸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29)

 

성경과 꾸란의 수집 과정의 엄청난 차이는 그 수집 과정에 소요된 시간적 차이다. 구약과 신약의 수집은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반면 꾸란의 수집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35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분명 꾸란이 최후에 기록되어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성경을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꾸란이 성경을 전제로 하며 성경을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성경이 형성된 삶의 자리는 익명의 교회 공동체들이다.30)

 

공일주는 “무슬림들은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는 그 권위를 부인하고 성경을 거부한다. 그 이유로 성경은 꾸란에 의해 무효하거나 성경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의해서 변질되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31) 위의 논의를 볼 때 이슬람과 기독교는 경전에 대한 문제가 서로 다르다.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무슬림은 성경이 변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성경 외에는 더 이상 계시된 책이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이런 면에서 양 종교 간의 불인정이 갈등의 요인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성경과 꾸란에 언급된 차이는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첫째, 죄(sin)에 대한 부분이다.

무슬림은 죄를 실수, 잘못이라고 이해한다. 이슬람의 샤리아 법을 어긴 것을 까띠아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죄에 대한 이해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 혹은 알라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거짓말32)도 포함된다. 성경은 죄의 의미를 하나님과 우리와의 분리를 뜻한다. 이슬람에서 죄의 소멸은 선행을 하면 사라지고, 기도를 많이 하면 사해지고, 메카의 카바에 가서 흑석을 만지면 죄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의 부패성과 그의 죄가 유전된다는 말은 꾸란에 없다. 또 성경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죄의 해결법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33)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믿는다. 즉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둘째, 믿음의 이해다.

이슬람에서 샤하다는 알라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한다. 그래서 일부 무슬림들은 무으민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인간이 몸을 갖고 이 세상에 옴)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이만’이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을 원어로 타꾸와(taqwa)라고 한다. 이 어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을 두려워하는 태도’라는 의미지만 무서움은 아니라고 한다. 자위적인 태도로 최후 심판의 위험을 두려워하는 몸가짐이 타꾸와34)라 한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두려움의 마음이 곧 신앙이라고 한다. 꾸란 2장 212절 “믿음이 없는 자는 현세의 아름다움에 혹하여져 믿는 자들을 조소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야말로 그들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꾸란 49장 13절과 5장 60절에서 공통적으로 그대들이 신자라면 알라를 두려워하라고 명한다. 김용선은 “이슬람은 혈통보다 신앙을 내세우고 심판으로 경고하여 알라를 두려워하도록 하는 것이 이슬람 신앙의 핵심”35)이라 한다. 기독교의 믿음 이해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요 3:36; 히 11:1-40).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히 11:3) 믿는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창 15:1-6). 마틴 루터36)는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신뢰라는 것을 강조한다. 믿음은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깔뱅은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37)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양 종교는 믿음의 이해가 좀 다르다.

 

셋째, 기도다.

기독교인의 기도(쌀라)는 아랍 무슬림의 쌀라와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무슬림의 기도는 절차에 따라 행하는 의식적인 기도를 말한다. 무슬림은 기도 전에 손발 얼굴을 씻는다. 구두를 신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순간순간 어디서나 하나님께 하면 된다. 기도는 매시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갖고 간구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차이가 있다.

 

넷째, 중생 곧 거듭남이다.

이슬람은 중생에 대한 단어에 당황한다. 성경의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요 3:1-11)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 만약 거듭남(중생)에 대한 단어 해석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을 바꾸었을 것이다. 무슬림은 거듭남이 인간의 사고 혹은 철학적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갈등의 요인이 된다. 그 외에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 성화, 칭의는 이슬람에서 비슷한 단어가 없다. 피드야(몸값), 캅파라(대속)란 말은 이슬람에 존재한다. 전자는 돈을 내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라마단 달에 금식을 하지 못했을 때 그 대신에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단어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요인이다. 기독교가 말한는 단어에 대한 차이가 상호간에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기독교가 사용하는 단어와 이슬람의 용어에서 오는 차이는 결과적으로 갈등 요인이 된다.


 

3.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인 차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최근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요인은 신학적 차이를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이슬람의 윤리는 기독교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법에서 증인도 남자 1명에 해당하는 여성의 수는 2명이라야 한다. 상속은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받는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면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슬람을 믿다가 버린 사람들은 배교자로 간주한다. 꾸란의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꾸란 2:256)는 것과 반대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보장하지만 이슬람은 인간의 자유 의지는 배제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것 외에도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 인간의 약함과 죄인, 일신론과 삼위일체, 예수의 신성과 인성, 개인 구원과 집단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등이다.

 

첫째,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이싸)가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38)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이 기적적이고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기적과 치유를 행하였고,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 그는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재림)으로 믿는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 즉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고 말하면서 무함마드의 권위는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가 성육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보는 견해가 다르다.

 

둘째, 율법과 은혜의 부분이다.

무슬림은 인간의 구원은 선한 행위(자카트)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며 조건은 신자만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요 1:12, 요 3:16, 행 16:31).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엡 2:1-10)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의 구원은 그들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달려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와 선하심을 확인해 준다.

 

셋째, 인간의 약함과 죄인(죄)에 관한 부분이다.

꾸란은 인간을 약하게 창조하였고 공동체의 도움으로 알라의 뜻에 복종함으로 알라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한다.39)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사람이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할 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인간의 연약한 부분과 죄에 대한 개념에서도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원죄와 자범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슬람이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넷째, 일신론과 삼위일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한 분의 하나님으로 사역은 각기 다른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 모습이라”(히 1:3)고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알라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유일무이하다. 만일 위격이 둘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알라에게 버금가는 동등한 다른 분을 둔다고 여긴다. 그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신교(shirk)라고 한다(꾸란 4:171; 5:71-73). 이싸는 알라에 의해 창조되었다(꾸란 3:59). 이슬람에서는 이것은 알라가 인정할 수 없는 큰 죄라고 한다.40) 성경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의 속성을 비교하면 이 둘이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같은 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섯째,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믿는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삼위일체 계시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상의 표현으로 본다.”41) 다윗은 시편 2:7절에서 메시야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42)로 동일시하였다. 이 호칭은 본문의 문맥상 신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를 경배해야 했다(히 1:5-6).43) 예수는 신성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증거하셨다(요 5:27, 9:35-37)44). 마태복음 5장 11절에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10:32에 ‘나’로 되어 있는 것이 누가복음에는 인자(12:8)로 되어 있다. 예수는 인자로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셨다. 하나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눅 19:10) 오셨을 뿐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막 10:45; 마 20:28) 오신 고난의 종의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자요 종말론적 왕의 역할이다.45) 예수는 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물으셨다(눅 22:48; 마 26:23-24, 45). 기독교에서 인자의 호칭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호칭은 예수의 신비스런 존재의 초월적인 초인간적인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46)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단순히 동등한 정도가 아니라 상호간에 절대적인 지식을 가진 자의 위치”47)에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보냈다(꾸란 3:49)고 말한다. 최영길도 꾸란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탄생을 아담과 하와의 탄생과 연계시켜 예수를 완전한 인성으로 보고 있다.48) 성경은 예수가 성육하신 하나님이시고 그의 인성 때문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셨다. 예수의 신성으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의 권능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요 3:35-36).


여섯째, 개인 구원 집단 구원의 문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개인 구원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에 기초한다. 이슬람에서 구원의 책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문제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슬람은 서로 연합된 이슬람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악을 멀리하는 자는 구원을 받으며(꾸란 19:72), 예배와 기도를 통한 구원(꾸란 2:186), 자신의 정화를 통한 구원(꾸란 91:9), 순종을 통한 구원(꾸란 39:54), 구원받은 자는 천국에서 영생(꾸란 11:108),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알라로부터 내려진 모든 경전을 믿어야(꾸란 2:4) 한다. 이상은 이슬람의 구원관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각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강조한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음을 증거한다(마 28:6; 막 16:3-8; 눅 24:1-12; 요 20:1-19). 예수는 부활 후에 승천하셨다(요 3:13, 6:62, 20:18), 그리고 예수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언젠가 다시 오신다(행 1:9-11)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꾸란 3:55, 4:157, 5:110, 23:50)49) 알라가 살아 있는 이싸(예수)를 들어 올리어 가셔서(꾸란 3:55; 4:158) 언젠가 이 땅에 자연사할 것50)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의 꾸란은 삼위일체(꾸란 5:76-69),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꾸란 4:169),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꾸란 112: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돌아가심(꾸란 4:156)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43:83-86)가 되심을 모두 부인한다.51)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차이가 있으며 교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난다.

 

그 외에도 성경과 꾸란은 신을 알 수 있는 길, 영감(어떤 의미에서 경전이 신의 말씀인가?), 신의 한 분 되심, 용서와 구원, 구원, 죄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양 종교의 용어에서도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지만 이슬람은 ‘셋’으로서 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계시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내려옴 또는 알라의 말씀이 내려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기독교는 신자를 성도라고 부르지만 이슬람은 독실한 사람, 기독교는 제자라고 하나 이슬람은 이싸를 따르던 사람들, 기독교는 ‘기도’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규정된 의례가 있는 기도’라고 한다. 그 외에 다른 용어도 차이가 나지만 여기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 이슬람이 기독교와 한 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꾸란 3:67은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닌 성실한 무슬림이었으며 또한 우상을 숭배한 분도 아니었노라.”52)고 되어 있음을 볼 때 기독교와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존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문명 간의 충돌과 전쟁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예견과 진단이 냉전 체제가 끝난 이후부터 있어 왔다. 21세기 문턱에 들어서기 전부터 세계 각처에서 터져 나오는 종교, 문화, 종족 간의 전쟁과 유혈 폭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의 새 시대를 희구해 온 것에 대하여 실망과 두려움, 좌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지난 19세기는 민족 간의 전쟁,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종교 간의 갈등과 전쟁의 시대가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할 정도다.53)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은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시대가 올 것인가를 놓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전쟁과 테러, 폭력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세력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구촌의 평화와 안정을 만들어 가기 위해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인종, 종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 종교 문화적 다양성과 다원적 구조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 오늘의 핵심이다.


 

A. 양 종교 간 대화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보더라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하나의 길로 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양 종교의 경전, 교리, 신앙이 다른 가운데서 두 종교 간에 어떠한 대화와 화해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양 종교의 지도자들은 대화를 통해 친선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그러나 폭력과 테러, 기독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이슬람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불만과 비판이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상호간의 오해와 편견을 풀고 함께 사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불가능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가 수세기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의 종교 시설에 불을 지를 수 있느냐며 놀라고 있다. 이는 상호간의 불신과 대화의 부재, 상호 불인정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 부흥과 이슬람화 운동을 위하여 신학적, 문화적으로 기독교와 평화 공존과 대화를 위한 만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들에게는 꾸란이 마지막 계시이고 그 전에 주어진 신구약성경은 꾸란의 빛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구약성경은 왜곡된 것이고, 서구 기독교는 그것이 정치적 접근이나 문화적 접촉, 그리고 선교적 접근, 그 외에 복지 차원의 접근이라도 십자군과 관련시킨다.54) 그들은 기독교가 어떠한 옷을 입고 찾아와도 방어적 평화의 입장을 취한다. 이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정치적, 신앙적 입장을 더 견고하게 한다. 전재옥은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은 전통적 근본주의자이건 반서구주의 근본주의라 할지라도 기독교 선교 활동은 허용하지 않을 뿐더러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55)고 말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시각적 차이 혹은 정신적, 신앙적 차이에서 종교 간 대화는 어렵다고 보인다.

 


B.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세계 평화를 위해 교회와 이슬람이 협력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선은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종교적 기원, 교리, 신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역시 기독교의 기원과 교리. 신학과 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인정이 요구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상대 종교에 대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이해는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슬람은 평화, 형제라는 것을 외치면서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종교라는 것으로 단정지어 버린다면 대화의 문은 닫히게 된다. 반대로 이슬람은 기독교를 향해 배교자,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이슬람화를 약화시키는 주요 단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대화와 이해는 불가능하게 된다. 양 종교가 상생하는 길은 역사적 종교라는 것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회 정치적 정의의 문제도 상호 보완 관계로 간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C. 문화적 공존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와 이해는 불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문화적 공존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슬람의 문화인 아랍어, 터키의 매블라나(춤-신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 이집트의 피라밋, 여성들의 베일 문화도 존중한다. 그러나 전세계의 평화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대화와 이해 그리고 문화적 공존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거나 인류의 행복을 위협하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우리가 대화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에서는 각 종교가 추구하는 믿음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상대 종교를 폄하하거나, 아니면 주관적 관점에 근거하여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기독교는 각 국가와 문화의 역사를 존중해 왔다. 선교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이슬람 식의 모스크를 세계 곳곳에 건축하고 있다. 이슬람은 문화와 종교가 혼연일치된 반면에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슬람 문화를 수용할 때 한 가지 우려하는 것은 이슬람 문화 가운데 있는 종교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 종교가 서로 간에 진리에 진위를 가려 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어느 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를 구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문화를 수용한다고 해서 그 종교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 전세계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구호를 펼쳤다. 실례로 한국의 많은 기독교 단체가 북한이나 외국의 소수 민족을 조건 없이 도왔다. 그렇지만 그들을 도울 때 기독교적인 어떤 시스템 구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우는 금융이나 구제, 이슬람 사원을 건축할 때 시스템을 통한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56) 이슬람이 기독교 지역이나 다른 곳에 선교할 때 그 시스템과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 문제 해결이 멀어져 가지 않나 염려된다.

 

결론적으로 양 종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사실적 근거에서 서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토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올바른 종교 간의 대화일 것이다. 건전한 토의와 대화는 양 종교가 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한 차원에서 상호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양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 여부를 명확히 드러내게 할 것이다.



 

Ⅵ. 나오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전쟁이란 생각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으로 유일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경전, 교리, 예배 의식, 신학적 차이 등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하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고 내가 만났던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차이를 알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계속해서 갈등을 겪는 것에 대하여 그리 반갑게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땅 위에 양 종교 간의 평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에베소서 2장 14-17절은 화목의 장면을 잘 소개하고 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피는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예수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증오의 담을 헐어 버리셨고 증오를 증식시키셨다.”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양 종교가 각기 갖고 있는 경전, 신학, 예의, 의식 모든 일에 충실하면 된다. 각 종교 본연의 일을 하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양 종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정면 대결을 통한 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해결은 항상 정면 협상이다. 개인은 지칠 때까지 싸우거나 다시 서로에게 선한 말을 하도록 합의할 때까지 싸운다. 만약에 갈등이 해결될 수 없다면 약한 당사자는 협상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보다 안전한 장소로 물러날 수 있다. 협상의 장소에 멀리 떠난 다음 다시 돌아와 만나면 된다. 그 때 갈등의 격렬함을 가라앉히고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선한 말(good talk)을 하려는 자신들의 바람을 전하고 나서 일상적인 사회, 종교,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57) 아무튼 양 종교는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본연의 신앙생활에 충실할 때 갈등이 없는 지구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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