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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0 (일) 17:29
   
“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1. 서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독자들이 이 문제를 간단한 서술을 통해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계산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보고 경험하는 종교 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들과 문제들만큼이나 쉽게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다. 따라서 이 글이 좀 길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해 말할 때, 근본적인 차이점을 비교분석해 보기도 전에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 문화적인 차이들, 각 종교의 신학적인 주장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 현상들에 국한되어 있다.



우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차이점을 모른 채 다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주제들은 결코 진위를 분별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리스도인들도, 무슬림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글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에 촛점을 맞추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측 신학자들의 교리에 대한 설명이나 주장이 아닌 양측 신앙의 핵심이자 근본인 경전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점을 가장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방법은 두 종교의 신앙적 기초가 되고 있는 경전들, 즉 성경과 꾸란을 직접 비교해 보는 방법 외에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본인들이 직접 이 방법을 사용하여 읽어보고 비교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즉 성경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그리고 인간의 삶과 타락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 또는 멸망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세상 역사에 대한 간섭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꾸란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종교로서의 이슬람이 세계의 최고의 종교라는 것이다. 꾸란에서는 이슬람 종교와 마호멭, 그리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즉 꾸란의 전체적인 내용은 종교 토론에 관한 것이다.





2. 첫번째 차이점은 경전의 주인공이다.

상식적으로 경전은 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밝히 알려주고, 피조물에 대한 그의 생각과 계획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어떻게 해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며, 그의 뜻이 무엇이며, 그의 뜻과 공의로운 계명들은 무엇이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 죄는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주만물과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마땅히 살아야 할 길과 인간의 삶의 이유와 가치와 목적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경은 정확히 이것들을 모두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다. 즉 하나님이 성경의 주인이다. 하나님에 대한 소개,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에 대한 계획에 대한 설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 외에도 무수한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많은 위대한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사도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정확한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종들일 뿐이다. 성경에서 사람들은 영원한 존재도 영원한 주인공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하나님을 만났으며, 순종하며 섬겼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계시하셨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역시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도 인류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 한 동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수납하며, 계명들과 구원의 약속을 보관하였다가 때가 찼을 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럼 꾸란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꾸란의 주인은 알라이어야 한다. 알라가 누구인지를 소개해 주고, 우주와 인류에 대한 알라의 계획과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또 어떻게 해야 인간이 공의롭고 선하게 살 수 있는지 그 계명들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꾸란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알라가 아닌 무함맏이다. 꾸란에 나오는 알라는 자신을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 계시하지 않는다. 꾸란에 드러난 알라의 인간에 대한 계획은 무서운 것들, 심판, 지옥들이다. 꾸란에서 알라는 무함맏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함맏이 처음 아랍인들에게 제시한 이슬람 종교를 지지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 꾸란의 진정한 주인공이 알라인지, 무함맏인지는 독자들이 직접 꾸란을 읽고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런 수고가 없이 그 진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독자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읽었다고 확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물론 꾸란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꾸란을 완독하려면 꽤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이것은 이슬람교에서 왜 그토록 무함맏을 신성시하며 절대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다른 선지자들처럼 동일한 인간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상 무함맏을 위해 다른 모든 그 이전의 선지자들은 철저히 무시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알라의 기록이라고 보면서도 꾸란을 위해서는 성경을 철저히 부정한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무함맏이 성경과 선지자들을 완성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이전의 선지자들과 사도들, 성경과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모두 부정된다. 왜냐하면 성경과 꾸란,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는 서로 하나일 수 없는 철저한 모순과 대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모순이 되고 충돌되는 둘 사이에서 분명히 하나는 100% 거짓이다. 물론 그 안에 약간의 진실이 들어있다 하더라도 전체는 용납될 수 없는 거짓일 수 밖에 없다.







3. 두번째 차이점은 역사성이다.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다. 성경 기록은 역사적으로 필기도구가 사용되었던 모세 이후부터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중동 지역과 로마 제국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하지만 꾸란은 글을 모르는 마호멭이 암송하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암송하거나 혹은 낙타 뼈에, 혹은 나무에, 혹은 돌에, 혹은 가죽에, 혹은 야자잎에 기록하였던 것을 세번째 칼리프 때에 대대적으로 편집했던 것이다. 꾸란을 읽어보면 문맥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곳이 아주 많으며, 문법적으로 오류가 많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꾸란이 알라에 의해서 마호멭에게 하늘에서 내려보내진 것이라는 전설을 꾸며냈다. 지금도 대영박물관과 터어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가장 오래된 서로 다른 꾸란 사본이 존재하며,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성경의 내용은 창조주 자신의 성품과 생각과 계획과 일들을 비롯하여 우주와 인류의 시작과 인간의 타락과 저주와 불행과 죽음의 시작,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섭리), 선지자들을 통한 구체적인 구원방법의 계시와 약속,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 종말과 이후의 세계를 총망라하여 역사적인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런 성경의 배열은 주로 이러한 역사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인물들과 지명들도 주로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진리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기준이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진리'란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참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꾸란의 기록 방법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슬람의 역사는 기원후 570년경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멭이 610년경 첫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기원후 610년 이전에는 이슬람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알라, 무슬림 등과 같은 단어 조차도 없었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기초가 없다는 것과 같으며, 새로운 종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역사와의 관련성을 설명해 줄 수 없으며, 창조주와 우주 및 인류 역사의 시작과 진행의 성격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이슬람은 처음 창조부터 수천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자신을 선지자로 스스로 주장한 마호멭에 의해 생겨난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인 공백을 메꿀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공백을 마호멭의 아내 유대인 여자 카티자와 그의 사촌이 제공해 주었다. 카티자의 사촌 바라카 나우팔은 무함맏이 모세오경에 예언된 "그 선지자"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부터 모하멭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기독교인들의 성경에서 찾았고, 자신이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종교의 기초와 배경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마호멭이 꾸란을 통해 유대-기독교의 역사적인 기록들 외에 더 추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실제로 꾸란의 내용들을 살펴 보면, 꾸란 이전에 이미 기록이 완성된 성경과 많은 상충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숙제를 풀기 위해 무슬림들은 이전에 기록되어 있었던 성경이 오염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 수 만 권의 성경 사본들은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오히려 이슬람은 자신들에게 없는 과거의 역사를 짜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전설을 꾸며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은 아담 때부터 있었다", "알라에게는 책의 어머니가 있으며, 꾸란은 알라가 직접 마호멭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었다" 히브리인이었으며 성경에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 불렸던 "아브라함은 (꾸란에서 말하기를) 유대인도 아니었으며,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그는 참 무슬림이었다" 등등 말도 안되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성에 대해서 언급한 만큼 이 주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루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불교는 신의 계시에 기초를 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이 인간의 삶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보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고통스러운 묵상의 과정을 거쳐 인간(싯다르타) 스스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불교가 인간의 공통적이고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동기로 삼아 자연스럽게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제공하는 해결책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마음을 열고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창조주 자신에 대한 지식과 창조주 자신의 계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무지하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창조주 안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자신과 인간의 깨달음이 기준이 되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는 마호멭이 그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들 가운데 존재했던 종교들과 자신의 아랍 종교를 비교해 보았을 때, 철저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저등한 자기 민족의 종교를 볼 수 있었다.



마호멭 당시에 메카의 카바신전에는 이미 오랫 전부터 섬겨오던 360개의 우상들이 있었고, 마호멭 자신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전에는 그 종교의 일들에 가담하였었다. 마호멭이 꾸란에 기록된 것처럼 "새로운 종교"를 아랍인들에게 초래하고, "알라의 종교는 이슬람이다"라고 선포했을 때, 아랍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던 옛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마호멭의 새로운 종교를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반대는 나중에 대단히 심해져서 마호멭과 그를 따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으며, 결국 메디나로 이주(하지라)하게 된다. 메디나에서 여러 지도자들이 마호멭에게 가세하게 되었고, 그 이후 최초의 이슬람의 시발점이었던 메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의 모든 이슬람의 확장은 무력에 의한 정복에 의한 것이었다.



이슬람의 확장은 불교나 기독교의 확장과는 전혀 다른 무력에 의한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슬람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강제에 의한 것이다. 물론 꾸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대로이다. 이슬람을 메카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꾸란을 객관적으로 통독한 사람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 마호멭의 모든 주장이 역사적인 사실이나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였기 때문이었다. 꾸란에 기록된 마호멭의 말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메카 사람들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그와 논쟁을 했던 유대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 모두의 주장이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낙원에서 흙으로 창조되었다가 타락하여 이 세상으로 쫓겨났다는 주장(여기에서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지만 꾸란에서 이 내용은 20 가지가 넘는 논리적인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함께 메카에 와서 카바 신전을 고쳤다는 주장,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이스마엘을 제물로 드렸다는 주장,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칼로 죽여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데 마귀가 비난하고 조롱하여 이스마엘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고 함께 마귀에게 7 개의 조약돌을 던져 쫓아버렸으며,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계속해서 이스마엘을 죽여 제물로 드렸다는 주장, 이슬람이 있기 아주 오래 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이슬람들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돌을 비처럼 내려 거역하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었다는 주장 등 모든 내용들이 역사적인 사건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메카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무함맏은 자신이 새롭게 만든 종교가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종교"라고 주장하였다.



무함맏은 선지자들에 대해 잘 모르는 아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수라 26:40에서 모세와 마술사들 간의 대결도 종교적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만일 마술사들이 승리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술사가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마술사를 따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나중에 이들 마술사들은 모세에게 패배하여 알라를 믿고 무슬림들이 되었다. 따라서 모세도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이다. 수라 40:26에서 이집트 왕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가 우상숭배를 옹호하는 자들의 대표, 즉 왕이었고, 무함맏을 두렵게 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모세는 무함맏의 예표가 되는 듯이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폭군에 의해 반대를 당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무함맏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종교를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 소위 무함맏이 말하는 모세의 종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함맏이 과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이용하자 아랍 우상 숭배자들은 선지자의 표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어떤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라 28:48-49 “이제 언젠가 그들에게 우리의 면전에서 진리의 (선지자가) 와서는 그들이 ‘그에게도 (즉 무함맏에게도) 모세에게도 주어진 기적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들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기적들에게도 불신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타우랕과 꾸란이) 서로 서로를 이용하여 힘 있게 하는 두 마법사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두 책 중) 모두에게 불신자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은 성경을 통해 자신이 성경의 하나님이 약속한 선지자라는 것을 확증하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았다. 그런데 성경과 꾸란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오늘날 모든 무슬림들은 그 동일한 성경이 꾸란과 무함맏에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타락했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부분과 어떤 내용이 타락했으며 변질되었는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시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는 이슬람 종교가 무함맏에 의해 생기기 벌써 오래 전부터 수 많은 사본들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수한 사본들은 손으로 베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정교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 사본들에 대해서는 수 많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미 잘 연구되어지고 있다.





4. 두번째 차이점은 신자의 삶을 지배하는 경전의 내용이다.



이 차이점은 두 책의 기록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초래하고 있다.

성경은 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약 1600년에 걸쳐서 수 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지만 꾸란은 “알라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보내진 책”이라고 불려진다. 실제에 있어서 꾸란은 무함맏의 암송과 주술에 따라 몇몇 서기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책의 분량은 성경이 훨씬 크고, 저자들도 많고 저자들의 신분과 살았던 시대 및 배경, 그리고 기록되었던 장소도 다양하기 때문에 내용의 일관성이 결여되고 많은 모순이 발견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성경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논리적인 반면, 단 한 사람의 낭독에 의해 기록된 꾸란은 읽으면 읽을수록 비논리적이며 더 많은 모순들이 발견된다.



기독교인들도 성경과 꾸란의 내용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무슬림들은 꾸란과 성경의 내용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꾸란이 그것보다 이전에 있던 성경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사원에서 몰도나 이맘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지, 실제로 그들이 꾸란과 성경 전체를 읽어보고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꾸란을 한 번도 읽지 않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고 있다.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기독교 선교사들도 꾸란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꾸란에 대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공된 상식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이슬람을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종교는 무함맏과 꾸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꾸란의 90%를 차지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주제를 알면 이슬람과 꾸란의 공허함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꾸란에서 종교에 대한 마호멭과 그 당시의 메카의 아랍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무함맏과 유대인 및 그리스도인들과의 종교에 대한 토론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진행되었으며 발전했는지를 꾸란 자체가 스스로 증거해 주고 있는 구절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무함맏은 자신을 거짓말쟁이와 미친 사람으로 비난하고 거짓 선지자로 취급하며 반대하는 메카인들과 아랍인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만든 새로운 종교를 변명하고,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에 발생했던 모든 상황을 꾸란을 통해 알리고 있다(물론 꾸란은 하늘에서 내려진 것도 아니며,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던 마호멭 자신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 세번째 칼리프에 의해 모든 자료들이 수집되고 편집되었다).



꾸란은 수라 3:52에서 이슬람을 알라의 종교라고 묘사한다. “이슬람이 알라의 종교이다”. 알라 앞에 있는 종교도 당연히 이슬람이라고 말한다. 수라 48:28 “그는 <알라는> 자기 선지자를 <무함맏을> 지혜와 진리 종교 (이슬람)으로, 그 (종교)를 모든 (종교)들에게 승리자와 위에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보낸 자이다.” 꾸란은 "이슬람이 알라의 종교이다" 라고 말하는데, 과연 절대 신에게 소위 말하는 "종교"가 필요한가?



무함맏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첫번째 단계로 그것을 알라의 종교라고 선포하였다. 수라 5:3에서 알라는 “너희 종교로서 이슬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알라는 무함맏 시대에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이며, 무슬림들을 위해 이슬람을 선택해 준 자인 것이다. 아랍 사회에 고대부터 마호멭 시대까지 있었던 아랍 우상숭배자들의 경우 수라 8:49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잘못 인도했다.” 다른 종교는 "자기 종교를 게임이나 흥미거리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한다(수라 6:70; 7:51).



그래서 무함맏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아랍인들에게 선포했다. 수라 5:3 “오늘 이제 불신자들인 어떤 사람들이 너희들을 너희 종교로부터 내어보냄으로써) 그들의 소망이 찢어졌다. 됐다. 너희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두려워하라! 오늘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너희 종교를 완전하게 했다. (너희들을 종교가 없는 어두움들로부터 믿음인 빛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나는 너희들에게 선행을 넘치도록 주었다. 그리고 너희들을 위해 이슬람을 종교로 만들어 선택했다. (즉 이슬람과 다른 종교들은 알라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수라 48:28 알라는 모든 종교 위에 참된 이슬람 종교와 인도로 자기 사도 무함맏을 보낸 자이다.



수라 61:9 “설령 우상 숭배자들이 싫어할지라도 모든 종교 위에 진리의 종교 이슬람과 인도를 선포하기 위하여 알라가 자기 사도를 보냈다.” 무함맏은 과거 종교가 없었을 때, 즉 이슬람이 없었을 때의 상태와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을 때의 상태를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본문은 알라가 무함맏의 아내들에게 명령하는 말에 해당한다. 수라 33:33 “전에 종교(이슬람)가 없었을 때에 옷을 입었던 것처럼 옷을 입지 마라!” 무함맏은 자기 이전에 있었던 모든 선지자들이 무슬림들이었고,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이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반면, 꾸란 여기 저기에서는 그가 당시에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였음을 스스로 말해 주는 구절들이 있다.



수라 34:48-49 “말하라! ‘당연히 나의 주가 진리인 꾸란을 (거짓인 무지 위에) 던진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아는 자이다.’ 말하라! ‘진리인 꾸란이 왔다. (그리고 거짓인 종교없음이 사라졌다. 이제) 거짓이 (새로운 종교없음을) 시작할 수도 없다. (옛날 종교없음을) 뒤돌이킬 수도 없다.’” 수라 36:5-6은 이 점을 대단히 분명하게 선언해 놓았다. “(이 꾸란은) 조상들이 (어떤 선지자를 통해서 종말의 고통을) 경고되지 않은 것에서, 전적으로 무지한 한 종족을 경고하기 위하여 전능하고 자비로운 분 편에서 내려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수라 53:1-11 “가라앉아 가는 별들에 맹세한다. 너희들의 주인 (즉 무함맏은) 망상에 빠진 것도 아니다. 실족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너희들에게 초래시키고 있는 꾸란을) 자기의 가벼운 바람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 (꾸란은) 오직 (알라 편에서 선지자에게) 계시되고 있는 (내려지고 있는) 한 계시이다. 그에게 (이 계시를) 한 밤에 충만한, 그의 소유자가 능력 (즉 가브리엘이) 교훈했다. 그렇다. 그는 (먼저) 높은 지평선에 (보여) 반듯이 섰다. 후에 가까이와서 낮추었다. 그렇다. (무함맏에게) 두 활 사이에 또는 (그것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그러자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의 종교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때 다음과 같이 논쟁했다. 무함맏과 무함맏 당시의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알라에게 자녀들, 즉 아들들과 딸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꾸란의 거의 대부분의 수라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수라 10:104 “오 사람들이여! 만일 너희가 나의 종교에 관하여 의심을 품는다면, 보라! 나는 너희가 알라보다는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을 숭배하지 않는다. 나는 알라는 숭배한다.



” 수라 42:21 “뭐라고! 그들은 동료들을 가지고 있고, 그 동료들은 알라의 허락도 없이 어떤 종교를 자기들을 위해 세웠다고?” 수라 49:16 “뭐라고! 너희가 너희 종교에 대해 알라에게 가르치겠다는 것이냐? 그러나 알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그는 모든 것들을 충만하게 아는 자이다.” 알라와 알라의 동료들, 즉 알라의 상대자와 딸 신들에 관한 아랍인들과의 바로 이 종교적 논쟁이 나중에 당시의 기독교인들과는 논쟁에서는 마리얌의 아들(이므란의 딸) '예수 그리스도(꾸란식의 표현임)가 알라의 아들일 수 없다', '알라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꾸란에서 마호멭은 이슬람의 신념 체계를 다음과 같이 세우고 있다. 마호멭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복종”이라고 정의하였다. 복종은 이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복종하는 종교가 이슬람이고, 복종하는 자들이 신자들이며, 복종하는 자들이 낙원에 들어간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수라 49:14 “아랍인들이 ‘믿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 무함맏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들은 믿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복종했습니다’ 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아직도) 너희가 믿음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에게 복종을 한다면, 그 분이 너희들에게 (행한 선한) 일들 중에서 하나도 적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꾸란과 이슬람에서 정결함과 부정함은 대단히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준다. 알라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씻는 절차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전의 아랍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더 완벽하다는 종교에 정결의식이 없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라 5:6 '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얼굴과 손을 팔꿈치까지 씻고, 머리를 물로 문지르고, 다리를 무릎까지 씻고, 몸이 의식에 깨끗하지 않다면 목욕하라. 만일 아프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여자를 접촉했거나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깨끗한 모래나 흙을 취해서 얼굴과 손에 문질러라' 라고 지시한다.



수라 98:1-5에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책은 꾸란이고, 이슬람 종교가 올바른 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유일한 알라에게, 그 분을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완전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구제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알라를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준수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종교는 알라 숭배, 성지순례, 금식, 나머즈 등과 같은 대부분의 아랍의 종교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추가로 구제, 아랍 방식의 정결의식, 세금, 결혼 및 이혼 절차에 대한 의식, 지하드 등과 같은 종교 규범을 추가시켰다.



무함맏이 이슬람 종교를 만들고 아랍의 우상숭배자들에게 선포했을 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아랍인들은 무함맏을 믿지 않았다. 수라 11:26-31절까지 무함맏이 자기 종족 아랍인들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은 유일한 알라에게 예배하라! (만일 유일한 알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면), 너희들의 위에 고통스러운 고난의 날이 (올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 때 그의 종족 중에 있는 불신자 어떤 사람이 ‘우리들은 너를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고, 너에게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낮은 사람 <천한 사람들만> 생각없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오 나의 종족이여, 소식을 주라! 만일 내가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문서를 소유한다면, 그리고 그 분이 나에게 자기 왕궁에서 은사-선지자직을 주었다면, 그러나 이것이 너희들에게 은밀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너희들을 너희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믿게 하도록) 강요해야 하느냐? …… 오 나의 종족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이것을 위해 소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 ”



무함맏이 아랍 우상숭배자들을 설득하려고 이용하였던 것은 주로 성경의 선지자들 이야기였지만, 그가 하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는 아랍인들도 아는 여러 전설들이 있었다. 수라 23:83 “이것은 단지 너희들의 이전에 있던 전설들이다.” 무함맏의 근거 없고 꿈을 꾸듯 횡설수설하는 소리들과 말도 되지 않는 전설들을 아랍인들이 믿을리가 없었다(수라 21:3-6). 실제로 꾸란 전체를 읽어보라! 수 많은 전설들과 꾸며낸 이야기들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함맏이 과거의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슬람을 확증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의 말을 들을수록 반대는 커졌고, 무함맏을 거짓말쟁, 마술사, 귀신들린 자 등으로 취급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한다.”) 수라 23:70 “또는 ‘그에게는 (무함맏에게는) 귀신들린 것이 있다.’ 라고들 하느냐?” 물론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능력으로 불치병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줄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통해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쉽게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호멭의 경우는 현저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꾸란에는 마법이나 마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무함맏의 말들이 무수히 많이 발견되며, 자기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지독한 저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겠다. 수라 73:17 “그렇다. 만일 너희들이 불신자들이 되면, (스스로 공포로) 아이들(의 머리카락들을 희어지게 하여) 노인들로 바꾸어 놓을 날(의 고난)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받을 것인가!”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 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함께 비난하였다. “너희들은 단지 한 마술에 걸린,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따르고 있다” 라고 하였다(수라25:8).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 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심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 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 (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별)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 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이 (무함맏은) 출저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수라 37:6-10 “참으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하늘을 별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종류의 불순종하는 사탄과 귀신들로부터 보호했다. 그 (귀신)들은 가장 높이 존재하는 자들을 (즉 천사들의 말들을) 언제든지 듣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그들에게 모든 방향에서 (별들이) 던져진다. 그들을 위해서 (종말에) 끊없는 고난이 있다. 단지 어떤 때 (어떤 말을) 엿들은 자가 (즉 귀신이) 있다면, 그것도 날으는 별이 쫓아가서 따라잡을 것이다. (그리고 멸망시킬 것이다).” 수라 75:7-10 “그렇다. (본 소름끼치는 것들로부터) 눈을 감고, (하늘에 있는) 달도 잡힌 상태에서 해와 달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 그 날에 그 사람이 ‘(이 재앙들로부터) 어디로 피난할 수 있느냐?’ 라고 할 것이다.” 본문에는 무함맏이 계시를 받을 때 얼마나 공포와 소름을 느끼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의 꾸란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비난을 하였다. 수라 25:4-5 그 당시의 사람들이 꾸란에 대해 비난한 내용이다. “불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이 꾸란은) 단지 (무함맏) 자신이 스스로 꾸며낸 거짓말이다. 그에게 이 (거짓말을 지어낼 때) 다른 어떤 종족 (특별히 책들의 종족)이 도와주었다’ 라고 모독하고 중상한다. 또 그들은 ‘(이것은) 이전에 있던 전설인데, (무함맏이) 그것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렇다. (이 전설들은 어떤 자들 편에서) 그에게 아침과 저녘에 읽혀져 주어진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난을 들으면서 무함맏을 따르던 자들 중 일부도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였다. 이럴 때 무함맏은 그들도 독한 말로 욕을 하였다. 수라 33”12-13 “그 때 외선자들과 마음에 상처받은 (즉 확신이 약한) 어떤 자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우리들에게 오직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 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많은 반대에 부딪히자 무함맏은 화가 났다. 무함맏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며,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 저주하기 사작하였다. 수라 43:22-26 “아니다. 그들은 말했다. ‘당연히 우리들은 조상들을 한 종족-종교 위에 있었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알라>는 당신<무함맏>보다 전에 어떤 마을과 도시에 어떤 증거자-선지자 보내지 않았다.



단지 그 곳의 나타난 것들이 : ‘당연히 우리 조상들을 한 족속-종교 위에서 찾았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라고 한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 조상들을 찾은 종교에서 올바른 종교를 끌어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말할 때, 그들은 : ‘당연히 우리들은 너희들이 사도로 만들어 보낸 종교에 불신자들이다’라고 말했다. 됐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복을 받았다. 이제 그를 (자기 선지자들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종족에게 말했었다.



‘당연히 나는 당신들을 숭배하는 우상들보다 정결하다.” 무함맏은 자기 동족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다투게 될 때에도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잘못된 우상에서 올바른 종교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에게 두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와 동족들이 섬겼던 우상 숭배에서 참 종교를 이끌어 낸 것과 같은 행위을 무함맏 자신이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 무함맏은 자신이 조상들의 우상숭배에서 이슬람 종교를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물론 아랍 우상숭배자들의 비난 중에는 근거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무지막지하게 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함맏은 단지 아랍인들에게서만 반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았다.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축복 대신에, 서로에게 욕지거리와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던 지독한 말다툼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무함맏이 자기의 반대자들에게 무섭게 쏟아부은 저주로 가득찬 책이다.



꾸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진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 거짓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채운 책이다. 수라 32:13 “나는 지옥을 (불신자) 귀신과 사람들의 모든 자로 채우는 자이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말을 마귀 이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독한 저주를 퍼붓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메카에서 무함맏의 종교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도리어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수라 18:15, 16 “자 우리 종족은 그분 외에 ‘신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우상들이 신인 것에 대하여) 분명한 한 증서를 가져온다면. (결코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 (어떠한 문서도 없이, 동료가 있다 라고 하여) 알라의 영광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보다도 난폭한 자가 누가 있느냐? (젊은이들이여!) 너희들은 그들과 알라 외에 그들이 숭배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너희의 창조주, 알라 자신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동굴에 피난처를 찾아가라! 너희 주가 너희에게 자기 은택을 크고 풍성하게 할 것이고, 너희들의 일들을 번성시킬 것이다.”



이랍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하고 반대하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아랍인들을 정죄하였으며, 점점 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품게 되었다. 수라 6:114 “(오 무함맏,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말하라!) ‘나는 알라 외의 다른 것을 맹세하겠는가? 그 자신이 너희들에게 이 책 (꾸란을) 상세한 (즉 너희들이 논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충분히 답변을 주는) 상태로 내려준 자이지 않느냐?’ 우리가 책을 준 사람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꾸란이) 너희들의 창조주보다 진리로 내려진 것을 알 것이다.”



수라 11:17 “자 이제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증서를 (즉 꾸란을) 소유한 사람이 (단지 이 세상의 유익들만을 찾는 사람들과 똑같겠는가?) 오히려 (알라) 편에서 온 증거 (즉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 (무함맏의) 동료이고, 그보다 이전에 (즉 분명한 문서인 꾸란보다 이전에) 모세의 책 (타우랕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도자와 (알라의) 호의이었다. 자, 그 자들이 (즉 분명한 증서를 소유한 자들이) 그것을 (꾸란을) 믿게 될 것이다. (선지자에게 대항하여 서는) 집단들 중에서 누구든지 그 꾸란에 불신자가 되면, 그에게 약속된 장소는 지옥이다.” 수라 21:7 “(오 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도 (천사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사람들을 (즉 인간들을)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계시를 보낸 상태로 선지자로 삼았다. 그렇다. (오 메카 족속아) 만일 너희들이 모를지라도 (타우랕, 인질을 아는) 족속의 지식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라!”



수라 21:7은 알라도 무함맏처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할 것을 몰르고 기대를 하였던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알라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무함맏에게 말했던 것이다. 수라 29:46-47에서 무함맏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라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쳤다. “(오 믿는자들이여) 너희들은 친근한 책-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직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토론하라! 단지 그들 중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만 (날카로운 관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너희들은 말하라! ‘우리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것에도 (꾸란도), 너희들에게 내려진 (타우랕과 인질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도, 너희들의 신도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복종을 한다.’ (오 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에게 책들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너에게도 책, 즉 꾸란을 내려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책이 (즉 타우랕과 인질이) 주어진 자들은 그것을 (즉 꾸란을) 믿을 것이다.”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와 오늘날의 무슬림들은 이 본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끊임 없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선을 행하고 있고, 또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평화를 원하더라도 무슬림들은 결코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맏은 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과 책을 읽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인정하여 주었다. 수라 3:52-54 “이제 언젠가 예수가 그들 (유대인들) 편에서 불신(신성모독)을 보고서, ‘알라의 (종교에 초대할 때) 누가 나에게 협력자가 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사도들이 ‘우리가 알라의 종교에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알라를 믿었습니다. 오 예수여, 증거하소서, 우리는 알라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창조주여, 증거한 것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충분합니다. 우리를 증거자들의 반열에 기록하소서!’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했다. 알라도 교묘하게 했다. 알라는 더 교묘하게 하는 자이다.



” 수라 10장은 무함맏이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극도로 호의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라 10:93-94 “의심 없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빼어난 최종적인 곳에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다. 후에 그들이 지식 (즉 모세오경)이 주어질 때까지 불일치(모순) 하지 않았다. …… (오 무함맏), 만일 우리가 너에게 밝힌 것들에서 (즉 전에 종족들에 대해 밝힌 우리 구절들에서) 의심하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 너보다 전에 있었던 책 (즉 모세오경과 신약성경) 읽는 사람들로부터 물어보라! 분명히 너에게 창조주 편에서 진리인 꾸란이 왔다.” 수라 44:29-32 “그렇다. 그들에게 하늘도, 땅도 울지 않았고, 그들에게 기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 참으로 우리는 그들을 아는 상태에서 모든 세상들, 즉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였고, 선호하였다.



” 비교적 초기의 메카 수라에 속하는 44장에서 무함맏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동경심과 감정은 거의 눈물을 쏟을 직전이었다. 수라 45:16도 비슷한 내용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종족)에게 책, 즉 타우랕,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들을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든 세상보다 높게 했다.”



그래서 무함맏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자기가 만든 새로운 신과 종교가 서로 비슷하니 함께 숭배하자고 제안한다. 수라 3:64-65 “ ‘(오 무함맏) 말하라! ‘오 친근한 책’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동일한 한 말씀에 일치하여 유일한 알라에게만 예배를 드리자! 그에게 어떤 것도 동료로 만들지 말자! 그리고 알라를 두자! 어떤 것들을 신으로 삼지 말자!’ 만일 그들이 (즉 친근한 책들 그 초대를) 거절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오 신자들이여)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 우리는 무슬림들이다. 유일한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라! ”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먼저 무함맏은 자기가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즉 구약과 신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와서 그것을 확증하는 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맏은 우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 모세의 종교, 노아의 종교이고, 무함맏은 그들의 종교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수라 12:38, 39 “나는<무함맏은> 나의 조상들의 길,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종족과 종교를 따른다. 우리를 위해서 알라에게 어떤 것을 동료로 만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 친구들이여, 흩어진 다양한 안개 “신들”이 더 좋은가 아니면 유일하고 승리자 알라가 더 좋으냐? 너희들은 그를 버려두고, 자기들과 조상들이 부른 이름들 – 우상들에게만 예배하고 있다…..가장 올바른 종교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과 조상들이 섬겼던 알라의 동료신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가 가장 올바른 이유는 알라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이며, 정통 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함맏과 이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아랍 조상들로부터 참된 이슬람 종교를 물려 받았다는 증거가 꾸란에는 전혀 없다.



무함맏에게 있어서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우상들을 섬긴 불신자들이었다. 무함맏이 자신의 선지자직의 정통성과 권위를 찾는 것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도 아니고, 결코 자신의 조상도 아닌 아브라함의 종교에 언제나 호소한다. 심지어 무함맏은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모세와 노아와 예수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슬람 종교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라고 선동한다. 수라 42:13 알라가 노아에게 명령한 것과 같은 동일한 종교를 너희를 위해 제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종교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즉 무함맏은 알라의 종교에 있어서 꾸준히 머물러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분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무함맏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무함맏은 자신이 과거의 다른 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 수라 46:9 “(오 무함맏) 말하라! ‘나는 선지자들 중에서 새롭운 자도, 첫번째도 아니다. (즉 나보다 이전에도 알라의 선지자들이 지나갔다. 왜 너희들은 나의 선지자들에게 놀라서 부정하려고 하느냐?) 나는 (미래에) 자신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무엇이 이루어질지를 모른다. 나는 단지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따르는 자이다. 나는 단지 분명한 경고자이다.



” 그러나 무함맏은 자기 자신이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여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한 것, 즉 전혀 특별한 점이 없고, 첫번째도 아닐만큼 뛰어난 점도 없다고 소개한 것과는 달리,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을 뒤엎어 놓을 만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를 존재가 되었다. 더군다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가 선지자들 중의 가장 위대한 지위를 찬탈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무함맏은 자신이 성경에 자신이 예언되어 있으며, 자신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있는 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함맏은 선지자들과 예언이 중단되었던 역사를 이어주는 자라고 선포한다. 수라 5:19 “오 친근한 책이여, 자 우리의 사도 (무함맏)이 전에 선지자들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우리에게 어떤 (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와 어떤 (지옥의 고통을) 두렵게 하는 자가 오지 않았다.’ 라고 너희가 말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종교 법령들을) 선포하려고 왔다. 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와 (지옥을) 두렵게 하는 자인 자가 왔다.” 본문은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무함맏의 무지를 드러낸다.



신구약 성경이 종결된 이후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떠한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함맏은 바로 이러한 세월을 간격을 이어주는 최종적인 선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무함맏이 문맹이 아니었고, 계시록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다면, 이미 오래 전 성경에 선포된 무서운 저주를 자기에게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 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19: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그러나 이러한 무함맏의 제안이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처음부터 한결같이 거절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다. 수라 3:65-71에서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했을 때, 그가 상당히 실망했음을 보여준다. 수라 3:65 “오 친근한 책, 왜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종교에 있었다 라고 하여) 논쟁하느냐! 결국엔 타우랕도, 인질도 그 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이 아는 것들 (모세와 예수 선지자들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이제 무엇 때문에 너희가 모르는 것 (아브라함이 어떤 종교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쟁하려 하느냐? 알라는 알고 있고, 너희는 모른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우에 (알라에게) 복종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자들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더 가까이 있는 자는 그(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자 이 선지자 (무함맏)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알라는 겸손한 자들의 친구이다. 친근한 책 중 한 교파는 너희들을 (너희 참 종교로부터) 혼동시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느끼지 못할 때에 단지 자기들만 혼동시킬 뿐이다.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증거자 되어 알라의 (타우랕에 있는 무함맏이 참 선지자인 것에 대한) 구절들을 부정하느냐?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알면서도 진리를 거짓과 혼합시키고 진리를 가두느냐?” 위의 본문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무함맏의 주장으로,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충분히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헛소리이다’ 라고 말했을 법한 말이었다.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 즉 무슬림이었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가까이서 추종하는 자는 무함맏과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무함맏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고 배척하였다. 무함맏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좋아했다가 그들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던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수라 구절이 있다.



수라 3:119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그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함맏에게 유대-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펴서 읽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함맏에게 성경 자체를 펴서 읽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자기의 거짓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거부했다. 도리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어 주면 문맹이었던 무함맏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수라 3:78 “그들 중에는 (유대인들 중에는)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책에 (타우랕에) 있지 않은 것을 ‘책에서’ 라고 너희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타우랕) 책을 혀들을 감아서 (망치고 변질시켜서) 그들이 읽어준다. 그리고 알라의 앞에서 오지 않은 (자기의 말들을) ‘알라의 앞에서 온 것’ 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알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무함맏은 구약과 신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유대-기독교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그대로인지 꾸며서 읽은 것인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거부했을 때, 무함맏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너의 종교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말라” 라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종교와 기독교를 동일한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과 극히 일부분의 이스라엘 종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두 이슬람 종교를 반대한 우상숭배자들이었다고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수라 4:171 “오 책이여, (예수를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너의 종교에 있는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알라 영광에 오직 진리의 말만 하라! 당연히 그 예수 그리스도 마리얌의 아들은 단지 알라의 선지자이고, 그의 마리얌에게 던진 말씀이고, 또한 그의 편에서 온 영일 뿐이다. 됐다. 알라와 그의 선지자들을 믿어라! ‘(주가) 셋 (즉 알라, 마리얌 그리고 이사 셋 모두 주님들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



꾸란에서 무함맏은 종종 유대교와 기독교를 세상에서 권위 있는 종교들에 포함시키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분파까지 무함맏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수라 2:62 “당연히 믿는 자들이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알라에게 믿음을 둔, 그러나 어떤 샤리아법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적인 분파인) 사비교도들 (그들로부터) 어떤 자들 (전에 어떤 종교에 있었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유일한) 알라에게, 종말의 날을 믿는다면, 그리고 잘 준수한다면, 그들에게 창조주의 앞에서 상급이 있고, 그들을 위해서 위험과 염려가 없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종교는 최고의 권위가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종교이다’ 라고 자주 말한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서 아랍 족속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그들의 민족의 조상이고, 종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수라 2:124). 알라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이맘으로 만들었고, 그의 자손들도 이맘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수라 2:130-132)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함맏 당시의 책의 사람들, 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무함맏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수라 3:19). 그래서 수라 4:171; 5:77 “오 책의 사람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 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각각의 종교에 서로의 침범해서는 안되는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슬람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꾸란에서 무함맏은 자주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 가장 올바른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항상 한 종교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꾸란의 종교적인 사상 때문에, 오늘날 수 많은 무슬림들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있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소?’ 라고 질문한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존중한다.’ 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수라 5:19 “오 책의 사람들이여! 자 우리의 사도가 너희 책들 중에서 감추어진 많은 것을 너희들에게 분명히 한 경우에, 많은 것들을 거절한 때에 왔다. 너희에게 알라로부터 빛과 분명한 책이 왔다…. 알라는 모든 것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을 포함한 꾸란의 많은 구절에서 알라는 흔히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인칭과 수가 꾸란 전권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1인칭 단수로, 아주 드물게는 3인칭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칭과 수에 관한 문제는 이후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유일한 신 알라에 관한 문제가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럼 유일신에 관한 무함맏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사실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이나, 무함맏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은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들이 무함맏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는 선지자들에 대한 무함맏의 꾸며낸 이야기들과 자기들이 익숙히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 사이에 존재했던 첨예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이에 첨가하여 기독교인들의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구속사적인 중요성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함맏은 당시의 아랍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라 3:79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이 소위 ‘선지자’라고 불렀던 예수께 대한 예배에 대해 무함맏에게 말했고, 무함맏은 자기가 새롭게 시작한 종교의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



“어떤 사람을 위해 알라가 그에게 책,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준 후에, 사람들에게 ‘알라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예배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 것이 아니다.”

결국 무함맏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죄하고 저주하였으며, 전쟁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수라 29:46 “(오 겸손한<신자> 자들이여), 너희들은 책들을 가지고 단지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대화하라! 오직 그들 중에서 억압-폭력을 사용하는 자들과만 (예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꾸란도, 너희들에게 주어진 모세오경과 신약성경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일라)도, 너희들의 신(일라)도 하나이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순종한다.’ 라고 말하라.” 초기에 반대에 부딪혔을 당시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차츰 노골적인 압력 행사로 악화되었다.



수라 9:29, 30 “알라와 말일을 믿지 않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부정하다고 한 것들을 부정하다고 알지 못하는, 진리 (즉 이슬람) 종교에 신뢰하지 않는 책들로 구성되는 어떤이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짓밟혀졌을 때 자기들 손으로 세금을 내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라! 유대인들은 ‘우자이르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서나 증거 없이) 그들의 입에 있는 말들이다.” 이 말은 분명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된다. 만일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슬람의 신과 동일하다면, 왜 이슬람은 억지로 유대-기독교인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려고 그처럼 가혹한 정벌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수라 5:72-73에서 보는 것처럼, 무함맏과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저주하고, 유대-기독교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고 왜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수라 5:72-73 “알라가 마리얌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분명한 불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 이스라엘이여, 나의 창조주와 너희 창조주가 되는 알라에게 종노릇하라!’ 라고 말했다. 당연히 누구든지 알라에게 쉬르크를 초래하면, 알라가 그에게 낙원을 부정하게<하람> 할 것이고, 그의 있을 곳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돕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알라는 셋 (즉 알라, 마리얌, 이사)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는 자들도 분명히 불신자들이다. 왜냐하면 유일한 알라 외에 어떤 신(일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말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 중 불신자가 된 자들을 고통스러운 고난이 붙잡을 것이다.” 수라 3:67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였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알라의 참된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우긴다. 이렇게 주장해야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함맏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라고 꾸란에서 여러 번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끊임 없이 주장한다. 즉 무함맏 자신과 이슬람 종교의 역사성에 치명적인 결핍이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수천년이 흐른 이후에, 즉 7세기 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슬람 종교에는 역사적인 기반과 배경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변함없이 존재했던 종교를 자기의 종교로 삼고, 그 역사적 전통을 가로채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모두 사실은 이슬람이었다’ 라는 억지주장을 내세웠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옮겼으며, 모든 선지자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었고, 자기는 가장 신실하게 이슬람 종교를 확증하는 최후의 선지자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모두 불신자들이며, 우상숭배자들로 정죄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한 후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막아놓았다. (알라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알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라 3:105 (종교적) 토론에 빠지는 사람처럼 되지 말라. 그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무함맏의 권위와 진실성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 무함맏은 이미 유대인들-그리스도인들과의 종교적 토론에서 자신의 거짓이 충분히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종교적인 토론을 할수록 자기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후 자기를 따르던 무슬림들도 종교적 토론을 하게 되면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는 어떤 대화도 용납치 않았고, 철저히 전쟁과 세금과 같은 압제를 통해서만 그들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일관되게 협박과 공갈로 자기 종교에 붙어있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교가 무슬림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다른 종교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저주가 되었다. 수라 41:13 “그렇다. 만일 그들이 (즉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이 이 상세한 설명 뒤에도 유일한 알라를 믿지 않고) 거절하면, 그 경우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들을 정확히 옫-야벳-과 사묻-샘- (종족들을 내려친) 번개과 같은 한 번개, 즉 멸망이 (임하는 것)을 경고한다.’”



한편 이슬람은 다른 종교처럼 분파로 나누어져서는 안된다고 명령한다(수라 6:159; 30:32). 하지만 이슬람 분파는 이후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나는 이 구절이 과연 무함맏 당시에 기록된 내용일까 의심해 본다. 이것은 꾸란을 편집했던 사람들이 삽입했던 구절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맥과 정황상 그처럼 의심되는 꾸란의 내용들이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꾸란의 개경장인 첫번째 수라인 파티하를 통해 보듯이 언뜻보기에 무함맏의 모든 설교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창조주, 유일한 알라만을 섬기고, 알라와 그가 보낸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고, 알라와 무함맏의 종교인 이슬람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함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슬람을 아름답게 포장한 가면과 같다. 꾸란의 다른 모든 내용은 파티하 수라장과 정반대의 알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함맏은 알라의 이름도, 모든 선지자들도,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도, 신구약 성경들도, 과거의 모든 역사도 모두 자신의 새로운 종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



천국은 종교적인 교훈이 가득찬 곳이다. 천국은 마땅히 고려해야 할 다른 수 많은 변수들을 무시해버리고 단지 이슬람 종교에 복종하는 자들만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희 중에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어떠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모순된 저주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슬림들은 죽은 후(혹은 심판 후) 모든 사람들이 일단 지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옥에서 낙원에 가는 것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사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세상에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인간 자신의 됨됨이나 내면의 세계, 혹은 과거의 생활과는 무관하게 지하드 즉 이슬람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 다치거나 죽으면 낙원에 간다고 감언이설로 전쟁에 초대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무슬림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꾸란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는 마호멭 자신의 설교였다.



꾸란의 전체적인 종교적 주제와 맥락은 다음과 같다. 즉 꾸란의 114장은 광범위한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 다룬 것이 아니라 주로 이슬람 종교에 대해 다른 것인데, 그것을 요약한다면 대단히 단순한 공식이 성립한다. 무함맏이 새롭게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와 그의 새로운 유일신 알라와 그의 새로운 움마 공동체인 무슬림들과 그들의 대표자로서 가장 중요한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와 같은 선지자들의 뒤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확증하는 자이다. 꾸란에 나타나는 노아, 샘, 함, 야벳, 아브라함, 룻, 요셉, 모세 등과 같은 선지자들은 많은 수라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했던 내용은 모두 한결같이 이슬람 종교를 전파했다. 또한 귀신들도 이슬람의 교리를 믿었고 다른 귀신들에게도 가르쳤다. 그 내용은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들인데, ‘알라는 유일하고, 그에게는 어떠한 동료도 다른 신도 없다.



창조 이후 모든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전파하는 이슬람에 관한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했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였다. 그들은 나마즈(이슬람식 수라 기도문 외우기)를 완전하게 수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말의 날과 부활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 경고하였다.’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이슬람 종교는 알라의 종교이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이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며, 이 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낙원에 들어가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지 않거나 이 종교를 배반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운 불속에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꾸란은 모두 114 수라로 구성되어 전체 부피가 적지 않지만, 대부분 동일한 주제와 사건과 이야기들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으로서, 실제에 내용에 있어서는 대단히 단순한 책에 불과하다. 무함맏이 가르쳤던 종교적인 의무들은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대단한 내용들도, 진리들도 아니다.



꾸란에서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가 가르치는 선행이나 도덕, 법에 관한 내용들과 그 의미들은 동서양 고금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비교했을 때에도 훨씬 수준이 낮은 것들에 불과하고, 우상숭배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형편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꾸란의 거의 모든 내용, 특히 선지자들을 이용해가며 했던 말들은 모두 그가 꾸며낸 거짓말들이며, 그 나머지도 타락한 인간을 감화하여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할 만한 특별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함맏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였던 것은 타당한 판단이었다. 이렇게 조잡한 이야기들이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배후에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영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무함맏이 말한 것처럼, 과연 성경은 무함맏의 확증을 필요로 하는가? 오늘날 무슬림들이 전혀 읽지 않고 있는 성경의 내용은 꾸란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질서정연함과 심오한 진리들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하다.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 죄의 시작, 하나님의 구원 계획, 언약, 예언,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과 계시, 인류 역사의 성격, 인간의 삶의 기준이 되는 공의로운 율법, 다양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내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언약들과 예언들의 구체적인 성취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약속된 성령을 받고 실제적으로 죄인이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과 의롭고 거룩하며 성화되어 가는 삶을 체험하는 것, 무함맏이 결코 제공해 줄 수 없는 수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의 발자취와 예수님의 거룩한 삶의 모범 등 그 어떤 것을 무함맏과 그의 책 꾸란이 흉내낼 수 있는가?



참고로 무함맏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비난들은 추가로 정리해 보았다.

거기에는 또한 탁월하게 신비한 과정을 통해 매듭(또는 옹이)에 숨결을 불어 넣는 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이슬람 지역에서 마법을 행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수라 113 “(무함맏) 말하라! : ‘나는 아침 창조자로부터 (나에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어둠에 빠진 밤의 악한 것으로부터, 마디들에 호흡을 불어넣는 (마술사)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그리고 질투하는 질투자의 악한 것으로부터 피난처 주기를 구하며 기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무함맏이 아랍 이방인들의 악한 영적인 세계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13 수라와 114 수라는 무함맏은 어떤 특정한 악한 진들(악령들)로부터 피할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 이 두 수라 뿐만 아니라 수라 7:200; 16:98; 41:36에서 무함맏은 무슬림들에게 사탄으로부터 피하도록, 수라 40:56에서는 꾸란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사람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수라 72:6에서는 진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알라에게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는 어떤 진들이 무슬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수라 72:1-19에서 “진들 중 어떤 것이 꾸란을 듣고서 진리의 길로 들어섰고, 꾸란을 듣고 당장 믿었으며, 창조주에게 그 어떤 동료도 있지 않다고 말하여 무슬림이 되었다. … 당연히 우리는 인스도, 진도 알라의 영광에 항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 수라 72는 진들이 직접 1인칭이 되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10-19절까지는 완전히 진들이 진들의 세계와 그들의 일들과 알라에게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무함맏은 그가 죽인 사람들의 영이 그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알라가 창조한 것이 그에게는 악하게 보였고, 이를 두려워했다. 무함맏 자신이 밤에 두려움으로 떨었다.



매듭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여인들과 마술사를 두려워했다. 무함맏의 알라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무함맏에 대한 당시 아랍인들의 평가가 꾸란에 나타난다. 메카 사람들은 무함맏을 공포에 이끌려 부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마주눈 (미친, 홀린)이라 했다(수라 37:36 – 미친자 시인; 44:14 – 미친 자).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 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 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심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 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 (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별)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 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이 (무함맏은) 출저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고, 생명을 주는 어떤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의미없이 중얼거렸던 시와 의미 없는 맹세와 무함맏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과, 그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출처도 모르는 계시를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자도 아니고, 꾸란이 사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사히르(마술사)라고 했다(수라 10:2 “불신자들은 ‘참으로, 이 (즉 무함맏은) 대단한 마술사이다’ 라고 한다”; 수라 15:15 “만일 우리-알라-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한 문을 열어 놓는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당연히 그들-아랍인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들의 눈들을 묶어 놓았다. 우리들은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다’ 라고 할 것이다.” ; 수라 38:4 “(메카 우상숭배자들이) 그들에게 자기들로부터 (즉 인간 족속으로부터) 된 한 경고자 – 선지자가 나온 것에 놀랐고, 그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이는 한 거짓 마법사이다. (그래서) 신들을 한 신으로 만들어 버렸느냐?



참으로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라고 했다.”). 수라 21:3-6 “당연히 그것을 조롱하여, 심령들이 전적으로 무지해진 상황에서 듣는다. 그리고 포악스러운 불신자들은 ‘이 자 (즉 무함맏)은 너희와 비슷한 한 인간일 뿐이다. 너희가 보고 있는 상태에서 마술에 (속으려고) 하느냐?’ (라고 하여) 서로 속삭인다. (그 때 무함맏이) 말하기를 ‘나의 창조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말을 안다. 그는 듣는 자이며,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함맏이 계시라고 주장하는 말들이) 조리없는 꿈들이다. (그 말들을) 아마도 그 자신이 지어내었다.



아마도 그는 한 시인이다. 그렇다. 그도 전에 보내진 선지자들이 (초래시킨) 것과 같은 어떤 이적을 초래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마슈르(마법에 걸린), 또는 미친자라고 했다(수라 17:47, 48 “우리는 그들이 너에게 (즉 너의 암송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 때 무엇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지를, 그리고 이 핍박자들이 서로 속삭이며, ‘분명히 너희들은 마술에 걸린 자들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노라. (오 무함맏) 그들은 네가 참으로 (마법에 걸린, 미친 자, 시인이라 하여) 어떤 예들을 드는 자들을, 됐다,



길을 잃고 (참)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보라!” 다음 구절은 무함맏의 표현 자체에서 왜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그를 마술사, 미친 자라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라 17:50-51 “말하라! ‘너희들은 돌이나 쇠붙이가 되라! 또는 너희 마음들에 (생명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 (모든 상태에서 알라가 너희들을 부활시킬 것이다)’ 아직 그들은 ‘우리들을 누가 부활시킬 것이냐?’ 라고 말한다. ……” 수라 25:9; 44:13). 수라 18:40-41 “분명히 나의 창조주가 나에게 너의 동산-또는 과수원보다 더 좋은 (한 동산을) 줄 것이다. (너의 동산에는) 하늘에서 벼락들을 보낼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매우 부드러운 땅으로 변화될 것이다.



또는 그것의 물이 (땅 밑으로) 흡수되어 너는 그것을 찾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카힌(점쟁이)라고 불렀다(수라 52:29; 69:38-42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이 보는 것들에도,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에도 멩세를 한다. 이 (꾸란은) 의심 없이 위대한 선지자의 (알라 왕궁에서 오게 된) 말들이다! 그는 어떤 시인의 말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 꾸란이 알라의 말인 것을) 아주 적은 사람만 믿는다! 그리고 어떤 점쟁이의 말도 아니다. 너희들은 아주 적은 사람만 교훈을 받아들인다.!” ). 또한 진의 인도를 받아 영감있고 리듬있는 시를 반복적으로 암송했기 때문에 샤이르(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라 37:36; 52:30; 69:42).

무함맏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으며, 결코 너그럽고 온유하게 용서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그의 마음 속에 항상 얼마나 악하고 저주스러운 가득차 생각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수라 구절들이 수 없이 많다.



위와 같은 무함맏의 많은 헛된 맹세와 변명들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과 저주로 가득찬 꾸란이 어떻게 죄로 인해 생명을 잃고 방황하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겠는가?

추종자들이 무함맏에게 가브리엘과 만났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자 그는 종 울리는 소리와 금속이 쿵쿵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가 계시를 받는 동안 추종자들은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붉어졌으며,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고, 가끔은 무의식 상태에 있었음을 보았다. 이처럼 무함맏은 계시를 받는 동안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이 홀린 듯한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다.



이 밖에도 무함맏에 대해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이 비난했던 단어들은 “거짓말쟁이”, “전설을 말하는 자”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최근에 우리가 일부러 꾸며낸 것도, 우리가 이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꾸란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꾸란 전체에 걸쳐 무함맏의 말들은 대체적으로 과장이 너무 심하고, 사소한 일에도 천국과 지옥을 운운할 정도로 언어에 경솔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무함맏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고안자이다.

이슬람 종교는 무함맏 이전에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AD 600년 이전에 ‘알라’, ‘이슬람’, ‘무슬림’ 이러한 단어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그 어떤 문서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종교는 하심 계통의 꾸라이쉬 부족의 아둡라의 아들 무함맏에 의해 아라비아의 메카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무함맏은 40세가 되었을 때, 가브리엘이라고 주장하는 천사에 의해 알라에 관한 계시가 아닌, 알라의 뜻에 관한 계시를 시리즈로 받았다. 무함맏은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세와 심지어는 예수까지 참 무슬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무지한 자힐리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자기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유일신 여호와가 있었다면,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맏에 의해 유일신이 되어버린 알라가 있다.



무슬림이란 단어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모방하여 ‘이슬람과 무슬림’, 즉 ‘복종과 복종하는 자’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기독교에는 그리스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함맏은 자기가 스스로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라면, 무슬림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이고, 이 알라는 그 이전의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한 위치를 찬탈해 버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손으로 왔다면, 자신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혈통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아브라함 – 이스마엘 – 무함맏 신화를 만들어 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우랏과 자부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이제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하디스가 경전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종교의 기준이 되었으며, 세계관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면,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따르는 자를 닮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무슬림들을 위한 공동체는 움마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영역을 무함맏과 그의 종교 이슬람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꾸란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수라 2:135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되라! 올바른 교훈을 찾자!’ 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되라!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라고 말한다. 너는 말하라! 오 무함맏이여!) 오직 우리는 참 길에서 떠나지 않은 자,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종족에 – 그의 종교에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무함맏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 천재가 아니었다. 무함맏은 거짓말쟁이였다. 그가 기록한 꾸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거짓말들로 가득차 있다. 무함맏은 수라 2:256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말한다. “종교에 강요하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탄과 무함맏은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 길을 막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꾸란에 대해 그 어떠한 질문도 의문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의 거짓말들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고, 어두움 가운데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대로 무력하게 이끌려 가는 불쌍한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야 한다.







참고로, 위의 본문에서 어느 곳은 마호멭으로, 어느 곳은 무함맏으로 다르게 불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최근 한국에 들어와 한국식으로 마호멭으로 부르는 것을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무함맏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모두 무함맏으로 통일했다. 또 위의 꾸란의 내용들을 한국의 꾸란 번역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텐데, 사실 한국어 번역본은 원문의 내용을 한국인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많은 내용을 고쳐 썼기 때문에 서로 참고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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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0 (일) 17:25
   
“ 다윗에 대한 성서와 꾸란의 비교 연구 ”

다윗에 대한 성서와 꾸란의 비교 연구



                                                                                 윤 석 구

1. 들어가는 말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테러’, ‘자살’, ‘세계 문화 유산의 훼손’, ‘여성에 대한 차별’, ‘일부다처제’ 지금까지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이 같은 부정적인 말들로 대변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인류의 한 축을 이루며, 알라를 믿고 사랑과 자비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되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9.11 테러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슬람에 대한 재조명을 통한 바른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혈충돌과 갈등이라는 창을 통해 이슬람 세계를 보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질을 들여다 볼 틈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테러의 모습을 이슬람 세계의 전체로 확대하여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벗고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구약성경을 비교하면서 다윗이라는 한 인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는 다윗을 꾸란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알라와 그들의 신앙을 살펴본다면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조금은 넓어지리라 생각된다.

   먼저 다윗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꾸란의 구절들을 찾아보고 그 내용을 성경과 비교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종합적인 결론을 맺는 것으로 본 연구를 맺도록 하겠다.



2. 꾸란과 성경의 비교 분석



   1)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다.

꾸          란

성    경(삼상 16:6-13)

(6:84) 하나님은 그에게 이삭과 야곱을 주어 그들 모두를 인도하였으며 그 이전의 노아를 인도하였으며 그의 자손 가운데 다윗과 솔로몬과 욥과 요셉과 모세와 아론을 인도하였노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보상을 주었노라

(16:11-13)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오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경은 어린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선택되어지는 과정을 사무엘상 16장에서 자세히 언급하면서 그가 선택된 것이 사람의 안목이 아닌 하나님의 안목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에서는 다윗 선택의 자세한 언급이 없이 단지 그 해설에서만 다윗이 18명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임을 언급하고 있다. 18명의 예언자를 네 가지 부류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 다윗은 대 가문들의 시조를 이룬 두 번째 부류로써 솔로몬과 더불어 유대 군주의 실질적 시조라고 말하고 있다.1)



  2) 골리앗과의 전투

꾸     란

성     경 (삼상 17:1-58)

(2:251-252) 하나님의 의지로 그들을 패배시키고 다윗은 골리앗을 살해했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권능과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더라 하나님께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토록 하여 인류를 보호하지 아니했다면 이 지구는 멸망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한 은혜를 베푸는 분이시라. 이것이 그대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는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

(17:48-51)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골리앗과의 전투에 대해서 성경은 사무엘상 17장에서 이 전쟁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위기와 극적인 반전, 그리고 승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은 ‘다윗이 골리앗을 살해했다’는 한 문장으로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대결을 너무 간단히 끝맺고 있다. 단지 꾸란의 해설을 통해 성경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이 엄청난 사건을 끝맺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계시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다윗과 골리앗 전투에 대한 선 지식과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다만 꾸란에서도 성경과 동일하게 다윗의 용기와 승리가 하나님을 의존함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권능을 주심으로 가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3) 최초로 갑옷을 만든 다윗

꾸       란

성       경

(21:80) 하나님은 다윗에게 갑옷을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었나니 이는 너희가 전쟁에서 너희를 보호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감사하고 있느뇨

(34:10-11) 하나님이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느니 산들이여 그리고 새들이여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라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쇠를 부드럽게 하였노라 그것으로 갑옷을 만들되 갑옷 쇠줄들의 균형을 맞추라 그리고 정직하게 일하라 실로 나는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

(삼상17:38)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꾸란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쇠를 부드럽게 다루는 기술을 주시고 갑옷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역사상 최초로 갑옷을 만든 사람이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이미 출애굽 당시에 제사장의 에봇을 설명하면서 갑옷 깃같이 깃을 짠다는 말이 언급되고 있고(출28:32, 39:23), 골리앗은 어린갑(魚鱗甲)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다윗도 어린 나이에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사울왕의 갑옷을 입어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갑옷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꾸란의 내용과는 상이한 면을 볼 수 있다.

  4) 다윗의 왕국을 강하게 하다.

꾸          란

성   경(삼하 8장, 역대상18-20장)

(38:17-20) 그들이 말하는 것에 인내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며 강한 남성인 다윗을 상기하라 실로 그는 하나님께 귀의한 자라 실로 하나님은 산천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아침과 저녁으로 합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했노라 그리하여 모인 새들 모두가 그와 함께 하나님께 순종하였더라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강하게 하사 그에게 지혜와 분명한 판단력을 주었노라

(삼상17:34-35)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삼하8:6)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8:11-12)다윗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8:14)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왕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꾸란과 성경은 동일하게 다윗의 용기와 용맹을 부각시키고 있고, 그 강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꾸란은 골리앗을 죽인 사건과 더불어 다윗이 강한 남성이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성경도 그가 비록 목동이었지만 사자나 곰을 물리친 사실을 들어 결코 유약한 소년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그가 용맹스럽고 천재적인 전사였지만, 그의 용기가 하나님을 의존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삼상 17:47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또한 꾸란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강하게 하셨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반면, 성경은 삼하 8장과 대상 18-20장에서 다윗의 정복 전쟁과 왕국의 번창과 그 지경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5) 다윗의 지혜

꾸         란

성         경

(21:78-79) 다윗과 솔로몬을 상기하라 어떤 백성의 양들이 밤중에 길을 잘못 들어 농장을 짓밟아 놓았을 때 그 둘은 심판을 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의 심판을 목격하였노라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 그 문제를 이해토록 하고 그들 각자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었으며 산들과 새들로 하여금 다윗과 더불어 하나님을 위해 찬송케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었노라

(27:15) 하나님이 다윗과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매 그들이 말하길 믿음이 많은 그분의 종들보다 저희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삼상18:5)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삼상18:14-15)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삼상18:30)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꾸란과 성경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6) 하나님이 다윗을 지상의 대리자로 두다.

꾸        란

성  경(삼하7:8-9, 역대상17:7-8)

(38:26) 다윗이여 우리가 너를 지상의 대리자로서 두었거늘 사람들을 진리와 정의로 판결하라 그리고 네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말라 그것들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매 하나님의 길에서 방황하는 자들에게는 계산하는 그날을 망각한 이유로 무서운 벌이 있으리라

(삼하7:8-9)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성경에는 꾸란에서 말하고 있는 ‘지상의 대리자’라는 말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삼하 7장에서의 ‘이스라엘의 주권자’라는 말과 함께 사 22:22에서는 다윗 족속의 권세와 통치를 상징하는 ‘다윗 집의 열쇠’라는 표현으로 가장 이상적인 왕이자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다윗이 언급되고 있다.



  7) 다윗의 회개

꾸        란

성      경(삼하 12장)

(38:21-25) 논쟁하던 무리의 이야기가 그대에게 이르렀느뇨 그들은 개인의 기도실 벽 위로 올라갔더라 그들이 다윗 앞으로 갔을 때 그가 그들을 두려워 하니 그들이 말하길 두려워하시오 저희는 의견을 달리하는 두 사람으로 누가 잘못하였습니까 저희들을 진리로써 판단하여 주시되 부정하게 마옵시고 옳은 길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이는 저의 형제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소유하고 있으며 저에게는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나의 보호아래 두라고 말하며 저에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말하길 그가 너에게 단 한 마리뿐인 너의 양을 그의 양떼로 두라 요구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 실로 많은 동업자들이 서로에게 잘못 하나니 이것은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이들과 같지 않노라 그러나 그들은 소수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함을 알고 주님께 부복하여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귀의하였더라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그를 용서하니 그는 하나님 가까이에 이르러 아름다운 안식처를 찾았더라

(삼하12:1-7a)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12:13-15)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꾸란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단지, 구약 성경 삼하 1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단 선지자의 비유와 유사한 이야기를 두 남자의 재판 과정을 통해 다윗이 접하게 되고, 이 두 사람의 재판을 통해 다윗이 자신의 잘못의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귀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함마드 아하마드 지하드는 그의 저서 「성경과 대비해서 읽는 코란」에서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라 약혼자였으며, 다윗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 준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천사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은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우리아의 충직함과 다윗이 요압과 짜고 우리아를 죽인 사건, 그리고 범죄 후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밧세바의 임신과 아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것은 성경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8) 다윗에게 솔로몬을 주다.

꾸         란

성         경

(38:30)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들로 솔로몬을 주었으니 그는 훌륭한 종이었더라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에게로 귀의하였더라

(삼하12:24)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성경은 솔로몬이 밧세바가 낳은 아들로 다윗의 열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3:2-5;5:14). 그러나 꾸란은 단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아들 솔로몬을 주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9) 솔로몬이 다윗을 상속하다.

꾸        란

성   경(열왕기상 1장, 역대상29:22)

(27:16) 솔로몬이 다윗을 상속하고 말하길 백성들이여 우리는 새들의 말을 배웠으며 모든 은혜를 받았으니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라

(왕상1:32-35)다윗왕이 가로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오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저희가 왕 앞에 이른지라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복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 너희는 양각을 불며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고 저를 따라 올라오라 저가 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

(역대상 29:22)이 날에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더라 무리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다시 왕을 삼아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 돌려 주권자가 되게 하고 사독에게도 기름을 부어 제사장이 되게 하니라

 



   꾸란은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뿐만 아니라 예언자로써의 은혜도 상속받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2)

  10) 산과 새들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다.

꾸         란

성          경

(21:79)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이해토록 하고 그들 각자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었으며 산들과 새들로 하여금 다윗과 더불어 하나님을 위해 찬송케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었노라

(34:10)하나님이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느니 산들이여 그리고 새들이여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라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쇠를 부드럽게 하였노라

(38:18-19)실로 하나님은 산천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아침과 저녁으로 합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했노라 그리하여 모인 새들 모두가 그와 함께 하나님께 찬송하였더라

(대상16:23)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대상16:32-33)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시103:20b)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꾸란은 다윗이 산과 새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성경은 법궤가 돌아온 것을 감사하며 다윗이 ‘온 땅’,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 ‘삼림의 나무들’이 즐거워하고 여호와를 노래할 것을 말하고 있을 뿐(대상16:7-36), 그가 직접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1) 다윗의 시편

꾸         란

성         경

(17:55)그대의 주님은 천지에 있는 모든 종들을 가장 잘 아시고 계심이라 하나님께서 일부 예언자들에게는 은혜를 더하사 다윗에게 시편을 주었노라

(4:163)실로 하나님은 그대에게 계시하였거늘 이는 노아나 그 이후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또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후손과 예수와 아이윱과 유누스와 하룬과 솔로몬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다윗에게 시편을 내린 것과도 같으니라

(대하7:6)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왕이 레위 사람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감사케 하던 것이라 제사장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섰더라

(대상23:5b)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

(시40: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눅20: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이슬람에서의 경전을 흔히 코란에 국한시키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에서의 경전은 크게 토라(Torah), 자부르(Zabur), 인질(Injil), 코란(Koran)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모슬렘들은 이 책들을 ‘거룩한 책들’로써 믿고 있다. 그중 ‘자부르’는 다윗이 쓴 시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에 기록된 시편에는 다윗의 시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들의 시들이 함께 들어있지만,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자부르’는 다윗의 시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가지고 있는 시편은 원래 다윗의 시들만 있던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보태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3)

   성경이 말하고 있는 다윗은 분명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수금을 타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삼상 16:14-23),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장송곡을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삼하 1:17-27). 다윗은 그의 유언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삼하 23:1)로 소개하기도 했다.

   150편의 시편 가운데 표제에 이름을 담고 있는 경우도 모세가 1번, 솔로몬이 2번, 에스라인 헤만이 1번, 에스라인 에단이 1번, 여두둔이 3번, 고라의 자손들이 11번, 아삽이 12번이지만 다윗은 73번이나 된다. 이렇게 다윗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 것은 그의 탁월한 시적인 감각과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꾸란이 언급하고 있는 다윗의 기록에 대해 성경을 찾아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해 보았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며, 이새의 가계에 태어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다스릴 메시야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윗에 대해 다른 어느 인물보다도 더 방대한 부분에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사무엘상, 사무엘하, 역대상이다.

   꾸란은 주로 21장, 27장, 38장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내용의 전개 없이 이곳 저곳에서 다윗의 행적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경의 내용들과 유사하였고, 단지 다윗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선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사건 전개를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

   꾸란에 기록된 다윗을 통해 그들이 섬기고 있는 알라 역시 지혜와 은혜를 베풀며, 용서와 자비의 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를 인정하지만, 한 인간 예언자일 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로 왔다는 사실은 부인하고 있다. 예수의 삶과 사역을 인간적인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이 있다고 그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멀리해서는 결국 선교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복음증거의 가능성을 만남을 통해서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어진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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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0 (일) 17:23
   
“ 이슬람에 대한 `百問百答` ”
이슬람에 대한 '百問百答'




이슬람에 대하여 100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적어놓은 조선일보내용입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神)’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族)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만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제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월 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 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 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년 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년 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親)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양(羊)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曆)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ㆍ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張)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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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0 (일) 17:20
   
“ “유럽의 이슬람화는 교회가 잠들어 있기 때문 ”
“유럽의 이슬람화는 교회가 잠들어 있기 때문” [2018.10.26 11:56]


아프리카 사제, 청년들 위한 주교회의 참석해 강조





▲스코틀랜드 한 교회. ⓒpixabay.com


아프리카의 한 가톨릭 사제가 “유럽의 교회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유럽이 이슬람화 되고 있다”고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25일(현지시간)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로마 바티칸에서 청년들을 위해 열린 주교회의(synod)에 참석한 카메룬 맘페교구의 앤드류 은키 푸안야(Andrew Nkea Fuanya) 대주교는 “교회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유럽의 전 교구가 사라질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앤드류 은키 대주교는 “만약 유럽이 이슬람화되어 기독교가 무너진다면, 그 결과는 아프리카의 교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별히 이슬람 침략의 배경을 놓고, 역사를 살펴보자면, 교회가 잠들고 복음과 멀어진 곳에 이슬람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며 “유럽도 교회가 잠들어 있으니 이슬람이 들어오고 있다. 현재 유럽은 이슬람화되고 있다”고 했다.

또 “서양의 사제들은 자신들의 명성, 특히 언론에 과도하게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사제들이 언론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매우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과 타협한다면, 주교회의는 아무런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애매모호한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청년들에게 혼돈만 줄 뿐이다. 우리 사제들은 진리를 신실하게 붙들어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진리와 멀어져선 안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강조점”이라고 했다.

이어 “성경에 관한, 특히 동성애에 관한 어떠한 타협도 아프리카로 내려올 수 없다. 우리가 애매모호한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청년들은 혼란에 빠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동성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청소년들을 주제로 열린 주교회의는 10월 3일부터 시작해 21일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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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0 (일) 17:18
   
“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장훈태 교수> ”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장훈태 교수>
 


 한국 기독교는 타종교의 정착, 이주자들의 종교 문화, 사회적 규범의 전이 등의 변화로 인해 서서히 갈등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각 도시마다 사원을 건립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공동체 모임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때문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이제 한국 내의 본질적인 화제가 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대 종교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일신 종교, 책의 종교라는 점이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으로 유일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경전, 교리, 예배 의식, 신학적 차이 등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또 다른 개별적인 특징이 있는 종교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두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여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접근 방법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는 아브라함의 종교, 유일신론, 책의 종교라는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갈등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현상학적 연구는 두 종교 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근원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기독교와 이슬람 갈등의 신학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양 종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논제이고, 양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급선무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땅 위에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피는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예수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증오의 담을 헐어 버리셨고 증오를 증식시키셨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양 종교가 각기 갖고 있는 경전, 신학, 예의, 의식, 모든 일에 충실하면 된다. 각 종교 본연의 일을 하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양 종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정면 대결을 통한 해결을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 양 종교가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본연의 신앙생활에 충실할 때 갈등이 없는 지구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Ⅰ. 들어가기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한국정착과 이슬람 금융, 무슬림들의 한국 사회 정착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와 기업에 공헌하면서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고 있다. 선교 125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독교는 타종교의 정착, 이주자들의 종교 문화, 사회적 규범의 전이 등의 변화로 인해 서서히 갈등을 맞이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기독교계의 이슬람 정착에 대한 우려와 염려는 이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각 도시마다 사원 건립을 하고 이주 노동자들의 공동체 모임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이제 한국 내의 본질적인 화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의 충돌 양상은 세계적 현상으로,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스위스와 프랑스를 비롯한 그 외의 여러 지역에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테러, 폭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 이에 대한 반응은 그리 달갑지 않다. 각 종교마다 갖고 있는 전통과 의식, 교리에서 오는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충돌은 불가피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대 종교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일신 종교, 책의 종교라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두 종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여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접근 방법에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좋은 관계를 형성·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현대 이슬람은 돈에 대한 갈증, 일에 대한 집착, 과도한 기술 문명, 조잡한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입지를 굳혀 가고 있다. 또한 궁극적 절대의 종교, 풍성한 문명, 심오한 인본주의, 영적인 신앙심은 이슬람이 보다 우수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는 아브라함의 종교, 유일신론, 책의 종교라는 원리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갈등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한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현상학적 연구는 두 종교 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근원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양 종교의 지도자와 신자들이 상호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와 관련하여 양 종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논제는 곧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기독교와 이슬람 갈등의 신학적 요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Ⅱ.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창조, 타락, 구속, 부활, 승천, 재림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교리는 삼위일체론, 성육신, 구속사다.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이라는 기독교의 세 가지 교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새로운 종교가 서기 622년 메디나1)에서 발생했다.2) 특히 이 종교의 경전인 꾸란은 3분의 2가 메디나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란에 나타난 이슬람 교리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육신과 구속의 교리 등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the Trinity)는 터툴리안이 최초로 사용하여 그 교리를 형식화하였지만 그 형식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자가 성부에게 부당하게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리겐은 이 입장에서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그는 신격에 있는 이 두 인격의 필수적 신성의 가치를 떨어뜨렸는데, 이는 아리안파(Arians) 형성에 디딤돌을 제공하였다. 아리우스파는 성자가 성부의 최초 피조물(the First creature)이며 성령을 성자의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리하여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등하다는 동질성은 하나님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되었으며 신격의 삼위 등급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아리안파는 여전히 신격 안에 있는 삼위 교리의 외형을 존속시켰지만, 이 교리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위하는 또 한편으로 성자의 신성을 보존하는 일위신론(Monarchianism)에 의해 희생되었다. 동력적 일위신론은 예수를 단지 사람에 지나지 않는 자로 성령을 신적 감화로 보았지만, 형태적 일위신론은 성부와 성자, 성령을 단지 신격에 의해 연속적으로 표시된 세 가지 현현의 방식으로 간주하였다. 한편 하나님의 유일성을 간과하고 삼신론을 주장한 자들도 있었다. 일부 후기 일성론자들 즉 존 아스쿠나게스와 존 필로포누스 같은 사람은 이 오류에 빠졌다. 중세기에는 유명론자인 로스셀리누스가 동일한 오류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삼위일체 교리는 4세기에 공식화되기 시작하였다. 니케아 회의는 성자를 성부와 일체되는 것으로 선언하였다(A.D. 325). 콘스탄티노플 회의(A.D. 381)는 비록 동일하게 세밀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였다. 삼위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 의해 발생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한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삼위일체 교리는 더 이상 발전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교리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유일성에 비중을 두었으며, 신학적인 논의는 보다 하나님의 인격에 비중을 두었다. 하나님은 계시자이며 계시(성자)이며, 계시하는 것(성령)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구약성경에 폭넓게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복수로 말하고 있는 곳은 창세기 1:26, 11:7이다. 그 외에 창세기 16:7-13, 18:1-21, 19:1-28, 말라기 3:1 등이다. 한 인격으로 언급되는 곳이 시편 33:6, 45:6-7도 있다. 메시야와 성부와 성자를 모두 언급하는 곳으로는 이사야 48:16, 61:1, 63:9-10 등인데, 이는 삼위일체에 관한 보다 완전한 계시를 함의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증거는 종종 여호와 엘로힘 사이의 구별과 함께 복수형인 엘로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언급으로는 성자와 관련한 내용에서 발견된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그의 백성들의 구속자와 구세주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그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주하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한다면, 신약에서 교회에 거주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신약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에 대한 명백한 계시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성부가 성자에게 이야기하시며(막 1:11; 눅 3:22) 성자가 성부와 교제를 가지시며(요 11:41, 2:27) 또한 성령이 믿는 자들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기도(롬 8:26)하심을 믿는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은 신적 실유에서는 구분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본질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실유 또는 구조적 본성에서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의 신적 실유에는 세 인격 또는 개별적 실재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 하나님의 구분되지 않은 온전하신 본질은 세 인격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보다 분명한 성경적 근거에 의하여 믿는다.

 

기독교의 중심 인물은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게서 시작된다. 예수를 보는 상식적 시각은 종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수를 신이라고 인정하기보다는 선지자 혹은 성자로 말하는 종교도 있다. 하지만 예수가 성육신하여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게 전달된 것은 탁월한 가르침과 행동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단순히 한 사람의 교사나 역할 모델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범주를 빌어 예수를 기독교인의 랍비, 현자로 묘사한다면 이것은 예수의 성육신, 인류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다. 예수는 단순히 교사, 역할 모델의 범주에 한정되는 분이 아니다. 예수는 교사이며 역할모델이면서 그 이상을 초월한 분이다.3) 예수의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식(義識)이다. 기독교는 독립적인 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기독교 신학이 사색과 숙고의 과정에서 돌아가야 하는 일련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 역사 종교다.4)

 

그러나 예수의 중요성은 역사적 의미를 초월한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창시자에 불과한 분이 아님을 믿는다. 예수는 하나님을 알리고, 구원,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 준 분이다. 이를 통해 보면 예수는 하나님을 계시한다(골 1:15; 요 14:9).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다. 마틴 루터는 “이슬람에는 꾸란이 있고 유대교에는 토라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알리길 원하지 않으신다.’ 또한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알려 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수는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열쇠다.”라고 했다.5)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들어오셨다는 기독교의 특별한 사상”이다. 성육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통하는 창”이라는 기독교의 특별한 믿음의 기초이다.

 

예수는 구원의 기초다(눅 2:11). 그는 백성을 친히 죄에서 구원하였고 그분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행 4:12). 그는 구원의 창시자이다(히 2:10). 따라서 예수는 구속받은 삶의 모델이다(엡 5:1).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 준다. 예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몸으로 보여 주고 계신다.6) 이는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일 4:7-11). 사랑하는 것이 곧 성육신 교리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육신 교리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구속은 매우 의미가 있다. 예수는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신다(마 1:21). 그분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행 4:12). 그분은 구원의 창시자다(히 2:10). 이런 사역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다.7) 기독교의 구속은 죄를 사하는 데서 시작된다.

 



Ⅲ.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

 


A.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의 정착

 

이슬람은 흔히 이슬람교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내세운 일신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이론이다. 이슬람교는 아랍의 메카를 기도의 방향으로 정한 것은 아랍의 전통 위에 확립시켜 세계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유대교와의 결부를 부정한다는 뜻이다.8) 이슬람의 가르침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아랍어로 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슬림 역시 이슬람을 복종하는 자나 이슬람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간주한 유럽 제국, 곧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배 하에 떨어졌던 무슬림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독립을 차지했다.9) 중동 지역과 터키, 이집트에서는 20세기 초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았었지만 기독교 소수 집단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처럼 추방되었다. 가끔 아르메니아인들처럼 학살당하기도 했다. 좀더 강력한 무슬림 소수 집단은 결국 평화롭게 유럽 지역에 정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과 프랑스다. 프랑스는 무슬림 소수 집단이 인구의 10%는 차지할 정도다. 인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20여 년 후에는 20%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독일, 미국에서는 그 숫자가 미미하지만 어쨌든 의미심장하다.10)

 

이들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 사건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문제는 인구 통계학적 방식과 공동체적 방식, 동화의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의 방식으로 제기되지만 보다 깊은 의미로는 종교적 방식으로 제기된다.

 

특히 프랑스가 ‘이슬람 공화국 된다’는 신문 기사는 서유럽 기독교 국가에는 충격이다.11)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꾸란 종교의 정착은 조금씩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 종교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은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39년 안에 프랑스는 ‘이슬람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란드는 15년 안에 인구의 반을 무슬림이 차지하며, 독일은 2050년 무슬림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12)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유럽 연합 내 회원국의 인구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50년이면 EU 내 무슬림의 수가 20%까지 급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08년 유럽 연합 회원국 내 무슬림 인구는 전체의 5%에 불과했다.

 

이미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7개 중에는 모하메드, 아웁(Ayoub), 메흐디(Mehdi), 함자(Hamja) 등 이슬람 이름이 절반을 넘는다는 보고도 있다.

 

스페인은 전체 인구에서 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비율이 1998년 3.2%에서 2007년에는 13.4%로 증가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은 전체 인구에서 무슬림이 25%에 달한다. 런던, 파리, 코펜하겐 등의 주요 도시도 10%에 이른다.

 

인구의 90%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오스트리아의 경우, 2050년에는 15세 이하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유럽의 인구학적인 변화는 교육, 주택, 복지, 노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통계는 유투브의 인구 통계 내용이다.13) 이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유럽인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이슬람 공동체의 정착은 출산율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보편적 견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슬람 비중치는 대부분 과장되었음을 말한다. 어느 한편도 정당한 정보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유럽에 이슬람의 정착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인은 자신의 국가에서 다른 국가와 문명이 발생하는 것, 공립 학교의 차도르 허용이나 혹은 금지에 대해 토론할 때 그들은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다고 핑계를 댄다. 그것은 인종과 관계된 것이 아닌 종교와 관계된 것임에도 종교적 불관용으로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일 경우 이슬람의 가치를 옹호하고 이슬람과 자신들의 종교의 공통점을 집착하는 데 성직자들이 쓴 문헌을 읽었다. 이 책들은 결국 이슬람을 위한 선전으로 읽히게 되었다.14)

 

유럽에서 이슬람의 정착 요인은 이주민과 종교적 연구, 저서의 발표, 무슬림 인구 통계, 출산률 등이다.

 


B.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정착

 

동남아시아의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그 외의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독특하다. 이 지역에 이슬람이 정착한 것은 정복, 중앙 집권화 된 국가의 강제, 외국 무슬림의 집단 이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역을 통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또한 대대적인 사회적 변화와도 무관하다. 이슬람의 동남아시아 정착은 절대적으로 무슬림 상인과 포교사들의 덕분이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소그룹 공동체를 건설하고, 국가의 형성과 교역 또는 정치적 정통성 확보에 관심 있는 현지의 엘리트들을 회유하여 이슬람이 정착하도록 했다.15)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정착한 것은 무슬림 상인들의 접촉과 정치적, 상업적 경쟁의 결과다.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가 정체성의 상징을 점진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인도네시아 이슬람 정착은 13세기경으로 올라간다. 당시 인도와 아라비아,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상인과 수피들이 처음으로 이슬람을 소개했다. 무슬림과의 무역에서 인도네시아 무역상, 중국 무역상과 경쟁을 하면서 해안과 강변의 소규모 공국의 통치자들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중심 교리와 이슬람의 발생 원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출발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일신교 가르침이 곧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믿는다. 꾸란 2장 125-140절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 가르침의 근본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족장 시대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카바 신전의 건설자가 아브라함이라고 보고 있다. 이 같은 부분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양 종교의 출발점에 대한 이론적 불일치는 결과적으로 갈등 즉 대화의 부재, 일치할 수 없는 긴 터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Ⅳ.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A. 기독교가 이슬람을 거부하는 견해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는 개인적인 삶과 가치 체계를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기독교의 도덕적 요구가 무슬림에게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듯이 보인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무슬림을 불안하게 한다. 그 교리는 하나님에게 연합체를 부여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시르크16)에 노출된 듯하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종교의 안정성과 견실함에서 자연에 대한 거부이다. 이슬람에서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알라의 계시만 있을 뿐이다. 둘째, 역사에 대한 부정이다. 성경은 역사이다. 계시는 단적으로 이행된다. 하나님은 말과 행위에 의해 역사에 개입하신다. 그러나 꾸란은 창조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해석하는 권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꾸란은 하나님의 역사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여러 역사를 포함한다. 셋째, 종교적 미덕과 관계가 있다. 계시가 된 종교에서처럼 자연 종교에서 발견되는 것이 도덕적인 미덕이다. 그 미덕은 경건함과 기도와 경배와 제사 의식 및 다른 비슷한 행위를 담당한다. 꾸란에서 계시의 진정성이 거부된다면 무슬림 신앙을 종교적 미덕의 특별한 형태에 결부시키지 않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17)

 

자끄 웰륄은 기독교가 이슬람을 거부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말하는 데 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갈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난 아들을 위한 약속과 축복은 있다. 그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안다. 사라는 하갈을 쫓아 내고,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도망가다가 천사에 의해 구출된다. 그리고 하갈의 아들은 천사의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수한 후손이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는다. 이러한 점이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부분일 것이다.18) 그러나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강한 주장을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거부의 견해가 된다.

 

다음으로 꾸란은 ‘마지막 계시’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슬람 신학은 인간 역사에서 네 권의 영감된 거룩한 책이 있다고 가르친다. 모세의 토라, 다윗의 시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 그리고 꾸란이다.19) 만약 꾸란과 이전의 계시 내용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 당연히 꾸란을 우선 순위에 둔다. 무슬림들은 꾸란만이 변질되지 않는 상태로 현재까지 보존된 유일한 책이라고 믿는다. 꾸란은 태초부터 하늘에 보관되어 있던 원본과 정확하며 원본과 일치하는 사본이다.20) 이슬람은 그들의 경전인 꾸란이 1400년 동안 단 한 글자도 왜곡되거나 첨가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한 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꾸란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다. 꾸란에 대한 이슬람교의 절대적 신뢰는 기독교와 내면의 갈등 요인이 된다.

 


B.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적 차이로 인한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은 출발부터가 다르다. 기독교는 창세기의 아담으로부터 출발점을 기초로 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족장 시대 인물이며 믿음의 아버지로 보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을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보는 데서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말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믿음의 길을 따라간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계보를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아 출발점에서 다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은 충돌과 갈등의 원인 제공도 되지만 그 점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 66권을 갖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21)이다. 꾸란은 총 114장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언어라고 한다. 꾸란은 이슬람의 교리, 종교 의식, 윤리법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늘날 세계화, 환경, 테러리즘과의 전쟁, 약물 복용, 의료 윤리, 여권 신장, 혼인과 이혼 등을 지원해 주는 내용을 꾸란에서 찾을 수 있다.22) 그러나 성경은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구약 39권 신약 27권이다. 성경은 40여 명의 저자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한 번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 사후 632년까지 계속해서 저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함마드는 글을 알지 못해 그의 추종자들이 이를 외우고 있다가 무함마드가 죽고 난 뒤 얼마 후 책으로 펴내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23) 꾸란은 철저하게 아랍어만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은 히브리어, 헬라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 다른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하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경전에서 공통점은 모두 신의 계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두 종교의 경전 모두 신의 영감된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이 경전에서 차이는 기독교는 성경을 통하여 창조, 타락, 구속, 부활, 승천, 재림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꾸란은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계시라고 하지만 성경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24) 이희수 교수의 주장대로 성경과 비슷하다면 꾸란은 완전한 경전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싶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그리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속의 드라마를 묘사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에 참여하고 구속에 공헌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창조 기사를 붙들고 있다. 성경의 사건 기록은 이스라엘의 먼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의 언어 형태, 스타일, 비유의 형상, 그리고 개념에 있어서 묘사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반영한다.25) 성경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즉 창조주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증거한다(행 14:15-17; 롬 1:19-20).

 


2. 성경과 꾸란의 차이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의 꾸란은 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과 꾸란은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꾸란과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전혀 다르다. 기독교 신학과 이슬람의 신학도 차이가 있다. 만일 같다면 기독교 신학대학과 이슬람의 샤리아 대학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양 종교의 신론이 다르다. 이슬람에는 성령론과 기독론이 없다. 기독교의 예정론은 이슬람의 숙명론과 다르다. 성경에는 꾸란에 나오는 무함마드가 없다.26) 보다 구체적으로 성경과 꾸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성경에 기록되거나 문서화되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그 문서가 사도들의 것이냐? 그 문서가 신앙에 부합하느냐? 그 문서가 모든 교회에게 인정되는가에 있다. 몇 편의 문서를 놓고 몇 세기 동안 논쟁을 거친 후 정경으로 인정한다. 서방교회(로마 카톨릭)에서는 히브리서의 인정을 놓고 논쟁을 했고, 동방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놓고 논쟁했다.27) 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은 4세기경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을 보면 성경은 교회의 신앙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꾸란의 형성은 성경과 다르다. 꾸란은 전적으로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것이지만 어록이 더 많다. 꾸란 42:7; 20:113; 12:2을 참조하면 “그래서 우리는 네가 그 도시(메카)의 어머니와 그 도시 주변 사람들을 경고하도록 하기 위해 너에게 아랍어로 된 꾸란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그의 말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그 기록은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되었다. 종말론적 경고로부터 신학적 논의를 거쳐 법률 규범과 설교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본문 양식을 포괄하였다.28) 이 때부터 단편적인 문장은 주제별로 묶어 정리하고 그 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정하였고, 무함마드의 죽은 후 꾸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29)

 

성경과 꾸란의 수집 과정의 엄청난 차이는 그 수집 과정에 소요된 시간적 차이다. 구약과 신약의 수집은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반면 꾸란의 수집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35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분명 꾸란이 최후에 기록되어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성경을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꾸란이 성경을 전제로 하며 성경을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성경이 형성된 삶의 자리는 익명의 교회 공동체들이다.30)

 

공일주는 “무슬림들은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는 그 권위를 부인하고 성경을 거부한다. 그 이유로 성경은 꾸란에 의해 무효하거나 성경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의해서 변질되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31) 위의 논의를 볼 때 이슬람과 기독교는 경전에 대한 문제가 서로 다르다.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무슬림은 성경이 변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성경 외에는 더 이상 계시된 책이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이런 면에서 양 종교 간의 불인정이 갈등의 요인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성경과 꾸란에 언급된 차이는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첫째, 죄(sin)에 대한 부분이다.

무슬림은 죄를 실수, 잘못이라고 이해한다. 이슬람의 샤리아 법을 어긴 것을 까띠아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죄에 대한 이해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 혹은 알라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거짓말32)도 포함된다. 성경은 죄의 의미를 하나님과 우리와의 분리를 뜻한다. 이슬람에서 죄의 소멸은 선행을 하면 사라지고, 기도를 많이 하면 사해지고, 메카의 카바에 가서 흑석을 만지면 죄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의 부패성과 그의 죄가 유전된다는 말은 꾸란에 없다. 또 성경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죄의 해결법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33)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믿는다. 즉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둘째, 믿음의 이해다.

이슬람에서 샤하다는 알라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한다. 그래서 일부 무슬림들은 무으민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인간이 몸을 갖고 이 세상에 옴)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의 믿음을 ‘이만’이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을 원어로 타꾸와(taqwa)라고 한다. 이 어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을 두려워하는 태도’라는 의미지만 무서움은 아니라고 한다. 자위적인 태도로 최후 심판의 위험을 두려워하는 몸가짐이 타꾸와34)라 한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두려움의 마음이 곧 신앙이라고 한다. 꾸란 2장 212절 “믿음이 없는 자는 현세의 아름다움에 혹하여져 믿는 자들을 조소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야말로 그들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꾸란 49장 13절과 5장 60절에서 공통적으로 그대들이 신자라면 알라를 두려워하라고 명한다. 김용선은 “이슬람은 혈통보다 신앙을 내세우고 심판으로 경고하여 알라를 두려워하도록 하는 것이 이슬람 신앙의 핵심”35)이라 한다. 기독교의 믿음 이해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요 3:36; 히 11:1-40).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히 11:3) 믿는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창 15:1-6). 마틴 루터36)는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신뢰라는 것을 강조한다. 믿음은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깔뱅은 믿음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37)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양 종교는 믿음의 이해가 좀 다르다.

 

셋째, 기도다.

기독교인의 기도(쌀라)는 아랍 무슬림의 쌀라와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무슬림의 기도는 절차에 따라 행하는 의식적인 기도를 말한다. 무슬림은 기도 전에 손발 얼굴을 씻는다. 구두를 신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순간순간 어디서나 하나님께 하면 된다. 기도는 매시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갖고 간구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차이가 있다.

 

넷째, 중생 곧 거듭남이다.

이슬람은 중생에 대한 단어에 당황한다. 성경의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요 3:1-11)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 만약 거듭남(중생)에 대한 단어 해석을 이해한다면 그의 삶을 바꾸었을 것이다. 무슬림은 거듭남이 인간의 사고 혹은 철학적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갈등의 요인이 된다. 그 외에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 성화, 칭의는 이슬람에서 비슷한 단어가 없다. 피드야(몸값), 캅파라(대속)란 말은 이슬람에 존재한다. 전자는 돈을 내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라마단 달에 금식을 하지 못했을 때 그 대신에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단어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요인이다. 기독교가 말한는 단어에 대한 차이가 상호간에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기독교가 사용하는 단어와 이슬람의 용어에서 오는 차이는 결과적으로 갈등 요인이 된다.


 

3.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인 차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최근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요인은 신학적 차이를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이슬람의 윤리는 기독교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법에서 증인도 남자 1명에 해당하는 여성의 수는 2명이라야 한다. 상속은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받는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면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슬람을 믿다가 버린 사람들은 배교자로 간주한다. 꾸란의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꾸란 2:256)는 것과 반대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보장하지만 이슬람은 인간의 자유 의지는 배제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것 외에도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 인간의 약함과 죄인, 일신론과 삼위일체, 예수의 신성과 인성, 개인 구원과 집단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등이다.

 

첫째,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이싸)가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38)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이 기적적이고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기적과 치유를 행하였고,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 그는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재림)으로 믿는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 즉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고 말하면서 무함마드의 권위는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가 성육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보는 견해가 다르다.

 

둘째, 율법과 은혜의 부분이다.

무슬림은 인간의 구원은 선한 행위(자카트)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며 조건은 신자만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요 1:12, 요 3:16, 행 16:31).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엡 2:1-10)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의 구원은 그들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달려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와 선하심을 확인해 준다.

 

셋째, 인간의 약함과 죄인(죄)에 관한 부분이다.

꾸란은 인간을 약하게 창조하였고 공동체의 도움으로 알라의 뜻에 복종함으로 알라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한다.39)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사람이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할 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인간의 연약한 부분과 죄에 대한 개념에서도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원죄와 자범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이슬람이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넷째, 일신론과 삼위일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한 분의 하나님으로 사역은 각기 다른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 모습이라”(히 1:3)고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알라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유일무이하다. 만일 위격이 둘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알라에게 버금가는 동등한 다른 분을 둔다고 여긴다. 그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신교(shirk)라고 한다(꾸란 4:171; 5:71-73). 이싸는 알라에 의해 창조되었다(꾸란 3:59). 이슬람에서는 이것은 알라가 인정할 수 없는 큰 죄라고 한다.40) 성경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의 속성을 비교하면 이 둘이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같은 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섯째,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믿는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삼위일체 계시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상의 표현으로 본다.”41) 다윗은 시편 2:7절에서 메시야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42)로 동일시하였다. 이 호칭은 본문의 문맥상 신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를 경배해야 했다(히 1:5-6).43) 예수는 신성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증거하셨다(요 5:27, 9:35-37)44). 마태복음 5장 11절에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10:32에 ‘나’로 되어 있는 것이 누가복음에는 인자(12:8)로 되어 있다. 예수는 인자로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셨다. 하나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눅 19:10) 오셨을 뿐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막 10:45; 마 20:28) 오신 고난의 종의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자요 종말론적 왕의 역할이다.45) 예수는 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물으셨다(눅 22:48; 마 26:23-24, 45). 기독교에서 인자의 호칭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호칭은 예수의 신비스런 존재의 초월적인 초인간적인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46)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단순히 동등한 정도가 아니라 상호간에 절대적인 지식을 가진 자의 위치”47)에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보냈다(꾸란 3:49)고 말한다. 최영길도 꾸란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탄생을 아담과 하와의 탄생과 연계시켜 예수를 완전한 인성으로 보고 있다.48) 성경은 예수가 성육하신 하나님이시고 그의 인성 때문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셨다. 예수의 신성으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의 권능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요 3:35-36).


여섯째, 개인 구원 집단 구원의 문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개인 구원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에 기초한다. 이슬람에서 구원의 책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문제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슬람은 서로 연합된 이슬람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악을 멀리하는 자는 구원을 받으며(꾸란 19:72), 예배와 기도를 통한 구원(꾸란 2:186), 자신의 정화를 통한 구원(꾸란 91:9), 순종을 통한 구원(꾸란 39:54), 구원받은 자는 천국에서 영생(꾸란 11:108),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알라로부터 내려진 모든 경전을 믿어야(꾸란 2:4) 한다. 이상은 이슬람의 구원관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각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강조한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음을 증거한다(마 28:6; 막 16:3-8; 눅 24:1-12; 요 20:1-19). 예수는 부활 후에 승천하셨다(요 3:13, 6:62, 20:18), 그리고 예수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언젠가 다시 오신다(행 1:9-11)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꾸란 3:55, 4:157, 5:110, 23:50)49) 알라가 살아 있는 이싸(예수)를 들어 올리어 가셔서(꾸란 3:55; 4:158) 언젠가 이 땅에 자연사할 것50)이라고 믿는다.

 

이슬람의 꾸란은 삼위일체(꾸란 5:76-69),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꾸란 4:169),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꾸란 112: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돌아가심(꾸란 4:156)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43:83-86)가 되심을 모두 부인한다.51)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차이가 있으며 교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난다.

 

그 외에도 성경과 꾸란은 신을 알 수 있는 길, 영감(어떤 의미에서 경전이 신의 말씀인가?), 신의 한 분 되심, 용서와 구원, 구원, 죄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양 종교의 용어에서도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지만 이슬람은 ‘셋’으로서 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기독교는 계시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내려옴 또는 알라의 말씀이 내려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기독교는 신자를 성도라고 부르지만 이슬람은 독실한 사람, 기독교는 제자라고 하나 이슬람은 이싸를 따르던 사람들, 기독교는 ‘기도’라고 하지만 이슬람은 ‘규정된 의례가 있는 기도’라고 한다. 그 외에 다른 용어도 차이가 나지만 여기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 이슬람이 기독교와 한 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꾸란 3:67은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닌 성실한 무슬림이었으며 또한 우상을 숭배한 분도 아니었노라.”52)고 되어 있음을 볼 때 기독교와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존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문명 간의 충돌과 전쟁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예견과 진단이 냉전 체제가 끝난 이후부터 있어 왔다. 21세기 문턱에 들어서기 전부터 세계 각처에서 터져 나오는 종교, 문화, 종족 간의 전쟁과 유혈 폭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의 새 시대를 희구해 온 것에 대하여 실망과 두려움, 좌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지난 19세기는 민족 간의 전쟁,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종교 간의 갈등과 전쟁의 시대가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할 정도다.53)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은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시대가 올 것인가를 놓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전쟁과 테러, 폭력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세력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구촌의 평화와 안정을 만들어 가기 위해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인종, 종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 종교 문화적 다양성과 다원적 구조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 오늘의 핵심이다.


 

A. 양 종교 간 대화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보더라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하나의 길로 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양 종교의 경전, 교리, 신앙이 다른 가운데서 두 종교 간에 어떠한 대화와 화해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양 종교의 지도자들은 대화를 통해 친선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왔다. 그러나 폭력과 테러, 기독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이슬람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불만과 비판이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상호간의 오해와 편견을 풀고 함께 사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불가능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가 수세기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의 종교 시설에 불을 지를 수 있느냐며 놀라고 있다. 이는 상호간의 불신과 대화의 부재, 상호 불인정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 부흥과 이슬람화 운동을 위하여 신학적, 문화적으로 기독교와 평화 공존과 대화를 위한 만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들에게는 꾸란이 마지막 계시이고 그 전에 주어진 신구약성경은 꾸란의 빛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구약성경은 왜곡된 것이고, 서구 기독교는 그것이 정치적 접근이나 문화적 접촉, 그리고 선교적 접근, 그 외에 복지 차원의 접근이라도 십자군과 관련시킨다.54) 그들은 기독교가 어떠한 옷을 입고 찾아와도 방어적 평화의 입장을 취한다. 이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정치적, 신앙적 입장을 더 견고하게 한다. 전재옥은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은 전통적 근본주의자이건 반서구주의 근본주의라 할지라도 기독교 선교 활동은 허용하지 않을 뿐더러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55)고 말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시각적 차이 혹은 정신적, 신앙적 차이에서 종교 간 대화는 어렵다고 보인다.

 


B.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세계 평화를 위해 교회와 이슬람이 협력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선은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종교적 기원, 교리, 신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역시 기독교의 기원과 교리. 신학과 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인정이 요구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상대 종교에 대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이해는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슬람은 평화, 형제라는 것을 외치면서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종교라는 것으로 단정지어 버린다면 대화의 문은 닫히게 된다. 반대로 이슬람은 기독교를 향해 배교자,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이슬람화를 약화시키는 주요 단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대화와 이해는 불가능하게 된다. 양 종교가 상생하는 길은 역사적 종교라는 것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회 정치적 정의의 문제도 상호 보완 관계로 간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C. 문화적 공존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와 이해는 불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문화적 공존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슬람의 문화인 아랍어, 터키의 매블라나(춤-신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 이집트의 피라밋, 여성들의 베일 문화도 존중한다. 그러나 전세계의 평화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대화와 이해 그리고 문화적 공존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거나 인류의 행복을 위협하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우리가 대화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에서는 각 종교가 추구하는 믿음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상대 종교를 폄하하거나, 아니면 주관적 관점에 근거하여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기독교는 각 국가와 문화의 역사를 존중해 왔다. 선교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이슬람 식의 모스크를 세계 곳곳에 건축하고 있다. 이슬람은 문화와 종교가 혼연일치된 반면에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슬람 문화를 수용할 때 한 가지 우려하는 것은 이슬람 문화 가운데 있는 종교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 종교가 서로 간에 진리에 진위를 가려 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어느 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를 구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문화를 수용한다고 해서 그 종교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 전세계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구호를 펼쳤다. 실례로 한국의 많은 기독교 단체가 북한이나 외국의 소수 민족을 조건 없이 도왔다. 그렇지만 그들을 도울 때 기독교적인 어떤 시스템 구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우는 금융이나 구제, 이슬람 사원을 건축할 때 시스템을 통한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56) 이슬람이 기독교 지역이나 다른 곳에 선교할 때 그 시스템과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 문제 해결이 멀어져 가지 않나 염려된다.

 

결론적으로 양 종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사실적 근거에서 서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토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올바른 종교 간의 대화일 것이다. 건전한 토의와 대화는 양 종교가 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한 차원에서 상호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양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 여부를 명확히 드러내게 할 것이다.



 

Ⅵ. 나오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전쟁이란 생각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으로 유일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경전, 교리, 예배 의식, 신학적 차이 등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하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고 내가 만났던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차이를 알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계속해서 갈등을 겪는 것에 대하여 그리 반갑게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땅 위에 양 종교 간의 평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에베소서 2장 14-17절은 화목의 장면을 잘 소개하고 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피는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예수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증오의 담을 헐어 버리셨고 증오를 증식시키셨다.”

 

나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각 종교가 갖고 있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된다. 양 종교가 각기 갖고 있는 경전, 신학, 예의, 의식 모든 일에 충실하면 된다. 각 종교 본연의 일을 하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양 종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정면 대결을 통한 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해결은 항상 정면 협상이다. 개인은 지칠 때까지 싸우거나 다시 서로에게 선한 말을 하도록 합의할 때까지 싸운다. 만약에 갈등이 해결될 수 없다면 약한 당사자는 협상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보다 안전한 장소로 물러날 수 있다. 협상의 장소에 멀리 떠난 다음 다시 돌아와 만나면 된다. 그 때 갈등의 격렬함을 가라앉히고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선한 말(good talk)을 하려는 자신들의 바람을 전하고 나서 일상적인 사회, 종교,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57) 아무튼 양 종교는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본연의 신앙생활에 충실할 때 갈등이 없는 지구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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